물질문명의 첨단 경험하며
전망했을 ‘미래’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여의도 태초에 비행장이 있었다. 아니 여의도는 애초, ‘비행장 그 자체’였다. 그 흔적을 찾는 일에 나선다. 시작은 여의도공원에서부터다. 공원 한쪽에 얌전히 놓인, 뭔가 이곳에 있는 이유가 분명한 것 같던 작은 비행기 한 대. 과거 언젠가, 우연히 공원에 들렀다가 혼잣말로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도심 한복판에 웬 비행기? 그것도 공원에?’ 그러니 오늘의 나섬은 그날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의도공원에 전시된 C-47 수송기. 1945년 8월 18일 한국 광복군이 탔던 기종이다.
여의도공원에 전시된 C-47 수송기. 1945년 8월 18일 한국 광복군이 탔던 기종이다.

108년 전, 무용함을 깨워낸 두 사건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어.”
“아하?! 그래서 여의도공원에 비행기가 있는 거군요?”
“소태산 대종사님도 비행기 타셨잖아. 여기, 여의도비행장에서.”

빌딩숲인 지금 여의도 모습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 본래 과거의 모습이란 그렇다. 분명히 존재했었음에도 어떨 땐 상상조차 어렵고, 지금에 흔적이 있어야 겨우 그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는 것. ‘여의도에 비행장이 있었고, 소태산 대종사가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는 말을 듣던 몇 년 전 어느 순간부터 여의도와 나, 여의도와 원불교의 관계는 더 가까워진 듯했다.

비행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여의도는 무용한 땅이었다. 한강을 따라 흐르던 흙과 모래가 쌓여 만든 모래섬, 그러니 농사도 어려웠다. 겨우 나지막한 산 하나(양말산, 현 국회의사당 자리)에 의지한 목축지로 활용됐다. 오죽하면 여의도의 본래 지명인 ‘너섬’을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너나 가져라’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까.

무용하던 이곳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16년 3월이 비롯이다. 당시 길이 600m짜리 활주로 공사가 시작됐고, 그해 9월 간이 비행장이 탄생했다. 딱 그즈음이다. 전라남도 영광의 작은 마을에서 26세 젊은 청년이 깨달음을 얻은 것도. 그러니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과 여의도비행장의 역사는 햇수를 똑같이 센다.

처음의 여의도비행장은 활주로와 격납고(비행기를 보관하는 공간)만 갖춘 간이 비행장이었다. 당시 일본군의 명분은 ‘민간 항로 개설을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중국 침략의 교두보로 활용하려고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딱 만주와 일본 가운데 위치했다는 점도 그렇고. 어찌 됐든,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 여의도에 세워진다.

1922년에는 한국인 비행사 안창남이 한반도 모양을 그려 넣은 ‘금강호’를 타고 우리나라 최초로 조선 상공을 비행했다. 이 비행을 보려고 서울 시민 30만명 중 5만명이 여의도비행장을 찾았다.
 

여의도공항-5.16광장-여의도공원
군용으로 활용되던 여의도비행장은 시설을 갖춰가며 1928년부터 본격 비행장으로 자리 잡는다. 이때부터 ‘경성비행장’으로 불렸고, 이는 1929년 서울에서 개최될 조선박람회 준비의 일환이기도 했다. 조선박람회는 소태산 대종사도 친람했고, <대종경> 불지품 19장과 천도품 6장 법문의 배경이다.

여의도비행장은 1924년부터 군과 민간이 공동으로 사용 가능한 ‘공항’으로 운영되다가, 잦은 침수로 인해 1958년에 민간공항 기능을 김포공항으로 이양하고 다시 군 비행장 역할만 수행한다. 그러다 1971년 공항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여의도가 전면적으로 개발되면서는 임시 공항 역할을 염두에 둔 5.16광장이 만들어졌다. 현재의 여의도공원은 5.16광장의 녹지화를 통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경험으로 내다본 ‘미래’
원기27년(1942) 5월, 소태산 대종사는 여의도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탔다. 박창기 선진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소태산 대종사의 비행기 탑승 기록은 이공주 선진의 글로 남아있다.

‘지난번 서울에서 창기가 비행기를 타자고 권하기에 응락하고 모든 행장을 차린 후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처음 비행기에 들어가 앉으니 종이에 솜을 넣어서 귀를 막게 하고, 할 말이 있거던 필담으로 하라고 연필과 공책을 달아 놓았는데 나는 창기와 마주 앉고 옆에는 일본군인 세명이 앉아 있었다. …(중략)… 얼마 동안 가다가 창기가 나를 흔들기에 눈을 뜬즉 ‘부여통과’라고 쓴 것을 보여준다. 창기의 얼굴은 아주 창백한데 또 ‘이리통과’라는 소리가 아득히 들리며(나는 귀를 막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 목천포 비행장에 내려서 자동차로 보화당까지 무사히 오게 되었다. …(하략).’(<금강산의 주인>, 청하문총간행회, 1984)

문득 궁금해졌다. 당시 공항과 현재 여의도교당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1950년 전후의 여의도비행장 모습이 담긴 사진을 수십 장 찾아 살피고 대조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비행기가 뜨고 내리던 지점이 현재 여의도교당과 불과 1km 내외인 것으로 추정됐다. 여의도에 원불교가 자리 잡은 인연 또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여의도비행장의 흔적은 도시개발을 겪으며 대부분 사라졌다. 하지만 아주 일부(활주로 끝)이 현재 여의도공원 자리에 포함돼 있다. 걸음을 멈추고 소태산 대종사의 심정이 되어본다. 

박창기 선진은 어떤 마음으로 소태산 대종사에게 비행기 탑승을 권했을까.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는 활주로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소태산 대종사의 ‘물질개벽 정신개벽’ 안목은, 이렇게 직접 체험과 경험을 통해 내다보며 준비된 것인지 모른다.

애초 여의도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 과거에는 볼품없는 흙색 모래섬이었고, 도시개발이 시작되면서는 아스팔트며 건물로 회색빛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계절마다의 형형색색이 빌딩숲의 삭막함을 걷어낸다. 그 아름다움의 중심에 여의도비행장의 역사를 품은 여의도공원이 있다. 

물질문명의 첨단이 시작되었던 과거의 그 공간은 이제 자연의 색을 입고 누구라도 찾아와 걷고, 쉬고, 머물게 한다. 기어코 다시, 4월의 봄이다.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3년 4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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