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견성은 쉬우나 수행은 장난이 아니다. 깨달으면 바로 힘이 생겨 변화가 일어날 것이란 기대는 애초부터 내려놓는 게 신상에 좋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제풀에 꺾여 넘어질 게 뻔하다. 아~주 오랫동안 어두웠다 밝았다를 반복하며 깨닫기 전이나 후나 겉으로 별반 달라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깨달은 자리는 명확한데 자성이 드러나는 시간은 감질나게 짧다. 

수행은 성품을 깨달은 후 자성반조를 하고 하고 또 하는 끝없고 지난한 여정임을 알아야 한다. 무명업장은 보란 듯이 여전히 힘이 장사고 자성의 드러남은 심히 미약하다는 것을 처음부터 받아들이고 긴 호흡과 인내심으로 소처럼 뚜벅뚜벅 홀로 갈 폭 잡으라. 견성은 초년에 쉬이 마치고 그 어려운 삼대력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고 삼학수행을 하는 것이 견성성불의 과정이다.

이론상으로 진리를 접한 이들이 대체로 하는 말이, 알긴 다 알겠는데 실천이 잘 안 돼 걱정이란다. 알긴 뭘 알아요~ 진리를 깨치고도 실천이나 변화가 멀고 어려운데 하물며 눈도 못 뜬 이가 목적지가 왜 빨리 안 나오냐며 실망스럽다고 하니 참 뭐라 해줄 말이 없다. 실천 걱정일랑 접어두시고 우선 칠흑같이 어두운 무명의 눈부터 뜨시는 게 좋을 듯하다. 

기질변화가 잘 되고 실천으로 이어진다 해서 그 사람이 수행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깨달은 이들이 바로 기질변화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고, 깨닫지 못하고도 기질변화가 잘되는 이들도 있으니 실천이나 변화의 여부로 깨달음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건 결단코 아니다. 깨달은 이라야 상대의 깨침 여부를 알아볼 수 있을 뿐이다. 견성 못한 이들이 하는 수행은 똑같이 견성 못한 이들이 보기에 훌륭해 보여도 눈 못 뜬 이들끼리 두 팔 더듬으며 좀 더 앞서가는 이들을 찬양하는 격이다. 
 

동정 간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수행의 완성,
자성을 발견해야 
참된 삼학수행 시작.

자성을 깨달은 후 주인인 자성이 얼마나 드러나도록 하는가가 수행의 요체다. 자성은 주인이고 삼독심 기질은 객심이며 도둑이다. 무늬만 주인이지 아무 힘이 없는 상태가 바로 견성 직후 모습이다. 기질이 잘 변하지 않고 삼대력 얻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주인행세 하고 있는 객심의 완강한 저항 때문이다. 깨달음을 얻었다며 갑자기 없던 주인이 나타나니, 오랫동안 토지와 집을 자기 것으로 알고 살아온 탐진치 객심은 순순히 내줄 의향이 전혀 없다. 게다가 이제 막 태어난 주인은 워낙 힘없는 아기인지라 자기 것을 주장할 줄도 모르니 도둑이 도리어 주인더러 나가라 큰소리친다. 실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장렬히 맞서 싸우니 이겨 먹기가 여간 쉽지 않다. 

자기가 주인인 것을 알았어도 그 집에 돌아와 주인 노릇을 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고 무명업장인 기질이 주인처럼 활보하며 세를 과시하게 된다. 

주인이 아무리 어리고 힘이 없어도 계속해서 나타나면 도둑은 살짝 기가 죽기 시작한다. 주인장이 집에 자주 납실수록 도둑은 점점 힘을 잃어간다. 자성을 비출수록 명확하게 주인 노릇을 하게 되어 점점 힘이 생기고 변화가 시작된다. 법마상전의 시절이다. 자성이 주인 노릇을 지성으로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도둑이 항복하고 나갈 때가 온다. 등기이전을 다 마치고 항마가 된 상태다. 결국 동정 간에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수행의 완성, 성불이다. 

수행은 주인인 성품이 무명업장 기질을 다스리는 과정으로, 자성을 발견해야 참된 삼학수행이 시작된다. 깨닫지 못한 이들의 수행은 조금 덜 나쁜 도둑이 더 나쁜 도둑을 내보내는 형국이라 오염된 수행이다. 허공법계의 주인장인 그대는 오늘 얼마나 그곳에 머무셨는가.

[2023년 4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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