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설창수, 진주 개천예술제 만든 ‘모두의 어른’

[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아버지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교사며 장사를 해서 가정을 꾸렸다. 새로운 일을 또 꿈꾸며 천지를 집으로 삼는 아버지에게, 중학생이던 장남은 겨우 입을 뗐다. 

“아부지, 거 예술제 그런거 말고 장사하모 안 되긋십니꺼? 장사를 그리 열씸히 하모 어머이가 저리 고생 안 할낀데예….”

아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벼락이 쳤다. ‘민중이 주인되는 축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왜 몰라주는지, 그리고 이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랐는지. 서운하기도, 속상하기도, 미안하기도 했을 아버지.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민간축제 ‘진주 개천예술제’를 만든 파성 설창수(1916~1998)다. 그리고 그때 그 까까머리 아들은 어느새 아버지 나이를 훌쩍 넘긴 어른이 됐다.
 

설법천 교도.
설법천 교도.

한국 최초의 민간축제를 만든 파성 설창수
설법천 교도(본명 봉규·진주교당)의 아버지를 역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언론인, 시인. 70여 년을 이처럼 많은 이름으로 ‘불꽃’같이 살다간 파성 설창수. 그의 ‘불’은 민중과 함께 하는 ‘들불’이었고, 그의 ‘꽃’은 남강변을 문화예술로 채운 ‘들꽃’이었다. 늘 ‘저들’보다는 ‘우리들’ 곁이었으며, 옥고를 치르거나 자리에서 해임됐을 때도 그 심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부재중이거나, 어쩌다 집에 있으면 누군가가 찾아오는 ‘모두의 어른’이었다. 다들 아버지와의 추억에 대해 물었지만 그의 답이 늘 궁색했던 이유다. 다만 이처럼 봄날엔 그 기억이 난다. 세 살 손자가 꽃을 꺾었을 때다. 동전 하나를 줄 때도 제일 깨끗한 것을 찾아 닦아서 줬을 만큼 귀애했지만, 그때만큼은 무섭게 화를 냈다.

“꽃을 실로 묶어서 잘린 가지에 다시 거셨어요. 그리고는 그 앞에 아이를 세워 나무에게 몇 번이고 사과하게 하셨죠.”

아버지는 이처럼 낮고 약하고 작은 누군가들에게 늘 진심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것이 문화와 예술이었고, 그래서 1949년 개천예술제를 만들었다. 그때 예술제의 흔적 하나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진주남강유등축제다.

“1년 내내 전국을 돌며 예술제 후원금을 받아오는 게 아버지 일이었어요. 그렇게 겨우 축제를 하고 나면 다시 전국을 돌았죠.”

1951년에는 <경남일보> 사장, 1960년에는 국회의원이 되어 살림이 좀 피나 싶었으나, 이듬해 5·16 군부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괘씸죄로 모든 자리에서 해임됐다. 어머니마저 교직에서 잘리고, 경기고 3학년이던 설 교도에게도 24시간 형사들이 붙었다. 그 와중에 한양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그와 가족들을, 어머니는 촉석루 기념품가게를 하며 건사했다. 
 

소설가인 어머니 이어 아들 부부가 함께 신앙
아버지 천도재 때 ‘일원상진리’ 읽고 시대문제 해법확신

일원상진리, 이 이상 있을 수 없다
아, 어머니. 그 이름 석자에서 이미 눈물이 어른한 그의 어머니는 바로 <원다희자전>을 쓴 소설가 김보성이자, 진주교당의 두 번째 교도 故 김일보원이다. 어머니 집안은 함경도 영변에서 가산을 독립군에게 헌납한 애국 가문이었다. 동경 니혼대학 유학 중 항일운동을 하며 아버지를 만났고, 그 귀한 집 딸이 진주까지 내려와 교직생활과 장사를 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그 삶이 곧 대한민국 역사였고, 설움 아닌 곳이 없었다. 

“집이 없었을 때도 힘든 티 안내던 어머니셨어요. 하지만 동생이 스무 살에 열반하니 크게 무너져 교회며 성당을 다 가보셨더라고요. 그러다 진주교당에 마음 붙이신 거죠.”
당시에는 원불교를 ‘어머니의 종교’라고만 생각하던 그. 그러다 원기73년(1998) 아버지 천도재를 진주교당에서 모시며 <원불교전서>를 건네 받았다.  

“전서를 처음 펴던 날 일원상진리를 읽었는데 불이 번쩍 나더군요. ‘이 이상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최고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일원상진리가 바로, 시대가 겪는 문제들의 해법이더라고요.”

아버지의 선물이자 어머니의 서원이었을까. 아내(이선영 교도)는 35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며 이미 교도가 된 터였다. 이후 아내와 다정히 ‘평산’, ‘평타원’ 법호를 받았고, 지금은 단전 지키는 재미로 산다. ‘내 단전에 큰 다이아몬드가 있다. 내가 안 지키면 뺏긴다’며 애지중지다.
 

그립고 또 그립다
아버지가 열반한지 25년, 여전히 ‘파성의 아들’로 불리는 설 교도. 그는 대학을 나와서도 연좌제로 입사서류 한 번 못내봤다. 그래서 뭐든 팔아야 했고, 빈 땅에 집도 지어야 했지만 원망 한 자락 없이 그립고 또 그립다. 가끔은 남강변으로 나가 평생 그의 ‘큰 바위 얼굴’이던 아버지의 동상을 본다. 닮기는 했지만 조금은 아쉽기도 한 동상 앞에서 그는, 아버지를 닮기야 했지만 조금은 아쉽기도 한 자신을 돌아본다.

오래전 그의 사모곡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어머니의 49재에서 아들은 이렇게 인사했다. 12년 전의 4월 26일, 지금처럼 환한 봄날이었다.  

“세우신 서원대로 전무출신 하셔서 진주교당 교무님으로 오시면 지가 말 잘 듣는 교도회장 할께예…태초부터 하늘은 한번도 흐려본 적이 엄꼬 / 구름만 지 혼자서 왔다리갔다리 해쌌는데 / 꽃밭을 지나온 바람에는 꽃내음 나고 / 허공을 지나온 허공에는 우리 어머이 냄새가 납니더.”

[2023년 05월 0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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