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어느 종교는 신앙이 강하고 어느 종교는 약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이건 깨닫지 못한 이들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겉으로 드러난 행태만 보고 신앙이 강하니 약하니 하는 것은 위험하고 무지한 언사다. 신앙이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가 아닌가, 정법인가 미신적인가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흔히 신앙이란 위대하고 무서운 힘을 가진 절대자가 따로 있다고 설정해 놓고, 그 절대자에게 완전히 의지하고 바치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아래 행하는 종교적 행위를 일컫는다. 사전적 의미가 이와 비슷하게 기술되어 있을 수 있고, 이것이 종교의 태동 배경이 될지는 몰라도 인지가 열린 시대에 맞는 참 신앙의 의미는 아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신, 부처, 진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보아서 부처를 부처로 모시고 받드는 불공을 말한다. 부처가, 신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보고 알아야 신을 모시는 신앙, 혹은 부처를 모시는 불공이 가능하다. 깨달음이란 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본 것이라, 견성 못한 이는 신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니 신을 모시고 받드는 신앙을 할 수가 없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가 하는 (소위) 신앙행위는, 모르고 하기 때문에 참된 신앙이나 불공이 아니라 미신이나 기복행위일 뿐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고 유서 깊은 종교여도 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고 믿는다면 사실상 미신이다. 성황당이나 장독대 정화수나 굿판 푸닥거리나 다 거기서 거기다. 세계 사업을 하며 선한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어도, 그 일 자체는 참 고맙고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나 참된 의미의 신앙과는 별개의 선행일 뿐이다.
 

일체만물 허공법계가
다 보고 다 알고 다 보응하는
인과보응의 주재자.

모두를 부처로 신으로 모시는 게
정확한 의미의 신앙.

물론 이런 기복적인 미신이나 맹신도 위력이 없는 건 아니다. 위안도 되고 어떤 면에서 큰 효능감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저 그뿐, 목적지를 모르고 열심히 엉뚱한 곳으로 가니 근본적 복과 지혜는 열리지 않고 고통은 지속되며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일원은 법신불이라 법신불 아닌 자가 없으니 처처불상이며, 처처불상이니 사사불공이 된다. 모두가 부처이니 부처로 대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우주만물에는 실지 불공을 올리고 허공법계에는 진리불공을 올리는 것이 사사불공이다. 법신불은 나눠짐 없이 한 몸이니, 남에게 베푼다는 것이 곧 내가 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체대비심이 나오며, 모두 법신불인 나를 위한 것이기에 상없는 보시와 불공이 된다.
모든 존재가 부처이며 위대하고 영험하다. 다 알고 다 보는 전지전능하신 신의 위력을 알기에 인과신앙을 할 수 있다. 작용한 대로 주고받는 일체 인과를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훤히 보고 알아야 아무 탈 없는 감수불보가 된다.

일체가 부처이니 부처로 모시고 베풀며, 일체 인과에 감수불보 하는 참 신앙은 깨달음을 얻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일체만물 허공법계가 다 보고 다 알고 다 보응하는 인과보응의 주재자임을 깨달아 모두를 부처로 신으로 모시는 것이 정확한 의미의 신앙이다. 이런 진리적 신앙, 사실적 신앙은 인지가 열린 시대의 지혜로운 이라야 행할 수 있다. 
무엇이 신앙인가? 신앙의 참 의미도 모르면서 겉 행태만 보고 어느 종교가 신앙이 강하고 약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절반이라도 가는 법, 모르면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게 여럿에게 좋지 않을까. 신앙이 약한 사람도, 신앙이 약한 종교도 없다. 단지, 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모름만 있을 뿐.

/변산원광선원

[2023년 05월 0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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