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지금 눈앞에 무언가를 보고 있는가. 지금 보고 아는 자는 눈동자인가, 그 너머 보는 자가 따로 있는가.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면서도 보는 자는 내내 함께 있다. 모든 순간 함께한다. 보는 자는 흔들림 없이 몸을 따라온다. 따라온 것일까, 몸 안에서 함께 비행기를 타고 온 것일까, 모든 순간 몸 안에 같이 있으면서 계속 보고 있는 것일까? 

다 보고 아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귀가 듣는가, 듣는 자가 따로 있는가. 혀가 맛을 아는가, 맛을 아는 자가 따로 있는가.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가, 냄새를 맡는 자가 따로 있는가. 팔이 알아서 움직이는가, 움직이게 하는 자가 따로 있는가. 발이 걷는가, 걷게 하는 자가 따로 있는가. 머리가 생각하는가 생각하게 하는 자가 따로 있는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움직이고 생각하는 그것은 어디에 있으면서 그렇게 하는가. 눈 속에 있는가, 입 속에 있는가, 귓속 머릿속 몸속에 있는가. 따로따로 하는가 하나가 다 하는가. 그 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하는 자는 어떻게 생겼으며 크기는 어떠한가. 그렇게 하는 자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모든 곳에 있다. 보는 자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계속 볼 수 있다. 육근은 텅 비어있다. 벽도 지붕도 바닥도 없는 허공이니, 보는 자가 그 속에 머물 수 있는 집이 아니다. 나로 여겼던 몸은 본질적으로 텅 빈 허공이다. 눈앞에 보이는 허공과 동일한 상태다. 텅 빈 허공 어디에 들어가 머물 수 있는가. 보는 자가 들어갈 집은 없다. 그냥 허공이다. 보면서 아는 자인 나는 온 우주에 가득하게 있다. 나는 공적 하면서 영지 한 것, 온 천지 가득한 만능자다. 온 우주에 가득하게 있으니 움직이지 않고 안이비설신의 기관을 만나면 만능이 사용된다. 가장 작은 먼지 크기 허공일지라도 만능상태로 있다. 일체 허공은 처처가 만능이다. 곳곳이 만능이기에 위치와 상관없이 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 육근 작용이든 천지 작용이든 일체 모든 작용은 하나로 텅 빈 허공이 하는 것이다. 텅 빈 것이 만능자다. 

비행기도 텅 빈 허공이며 벽이 없다. 성품인 나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나는 움직이는 자가 아니다. 꽉 차 움직임 없이 우주에 가득하다. 성품의 바탕은 움직임 없이 통으로 있는 진공이며, 진공이 곧 묘유다.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아서 우리의 육근이 작동 된다. 신기하게도 텅 빈 것이 다 보고 알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본체를 떠나지 않은 육근작용이 나다. 그렇게 바탕인 체를 떠나지 않고 육근작용을 하는 것이 참 수행이다.

나는 우주에 가득한 신령함이며, 이는 일체 모든 존재의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몸 안에 있지 않고 우주에 가득함을 잊지 말라. 이것이 강력하고 참되고 살아있는 화두다. 생생한 화두로 간절하게 정성 다해 단련해야 영생 문제가 해결되는 깨달음이 일어난다. 이 말이 신기하게 여겨지고 집중력이 계속되고 있다면 그대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깨달음이 가까이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는 세속적이며, 깨달음이 멀다. 현 상태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 말에 마음이 상했다면 다행이다. 마음이 상하면 분심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이가 가장 어리석고 가련하다. 

‘어찌할꼬! 어찌할꼬!’ 하며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언제 갈지 모르는 목숨인데 다음으로 유보할 일이 아니다. 상 내고 자존심 세울 때도 아니다. 가장 큰 자존심은 깨달음을 얻는 일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내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나는 허공인데 어디에 자존심을 세울 것인가. 허공에 탑 세우는 수고로움을 멈출 일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05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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