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호 교무
박윤호 교무

[원불교신문=박윤호 교무] 출가를 하기 전 <원불교전서>를 탐독하다가 자못 충격에 휩싸였던 대목이 있다. 바로 교사(敎史) 내용 중 삼창공사와 남한강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다. 충격의 이유는 시쳇말로 ‘흑역사’라 이름 할 수 있는 사건을 무려 경전에 실을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원불교라는 종교는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기에, 다른 종교가 온통 교조와 교단의 무오류나 무과실을 주장하는 와중에 자신들의 허점을 드러내 놓을 수 있는가 싶었다. 그야말로 경탄과 함께 무한신뢰가 싹트는 순간이었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던 어느 유명한 대기업 창업주의 말처럼 원불교는 이제까지 겪어왔듯이 앞으로도 있을 수많은 시련들을 담대하고도 통연명백하게 헤쳐 나가리라는 다짐과도 같은 개교반백년 교단사가 아닌가 싶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은 그 누구와도 나눠가질 수 없고 온통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인생의 고뇌와 슬픔을 마주하며 비로소 독립된 실존의 인격으로 성장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소설에서 마침내 어른이 된 주인공은 삶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마주하는 ‘슬픔’이라는 감정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한마디를 건넨다. 바로 반갑다는 인사말 ‘안녕(Bonjour)’이다. 떠나보내거나 회피하기 위한 안녕(Bye)가 아닌 잘 지내보자는 첫 만남의 인사 안녕(Hello)라는 점에서 독자들은 주인공의 성장을 지켜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한 인격뿐만 아니라 모든 가정·사회·국가·세계 교단 역시도 늘 크고 작은 고난과 슬픔을 마주하며 망망대해와도 같은 역사의 물결을 헤쳐 나가고 있다. 화목한 가정은 시련이 없어야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이겨낸 뒤라야 온전히 화목을 지켜낼 힘을 갖는다고 이름 할 수 있다. 
 

지난 과오 
온전하고 당당하게 
직시와 성찰해야
교단 성장 가져온다.

자녀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고타미라는 여인에게 부처는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찾아가 겨자씨를 찾아오면 아들을 살려 주마” 했다. 당연하게도 여인은 그런 겨자씨를 찾을 수 없었다. ‘생사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은 집착이 아닌 해탈에 있음’을 가르쳐준 방편이었을 것이다. 

해탈의 열쇠는 생사일여이며, 이는 죽음을 꺼리는 태도가 아닌 오히려 곁에 둘 수 있는 당당함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회 조직이나 국가 기관 등에서는 참담한 사건 사고가 벌어진 뒤 백서(白書)를 발간해 후인들에게 참고가 되게 하는 등의 노력을 해오고 있다. 

이는 사고로 인한 손실을 매몰시켜버리는 데 그치지 않도록 하고, 앞으로 있을 유사한 일 등에 미리 대비하고 연습하는 자산이 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잊혀진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주는 교훈이 나오게 된 이유이다. 

또한 비행기나 선박의 항해에 관련된 모든 안전관리 규정은 피로 쓰여 있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 죽고 다친 뒤라야 비로소 그 체크리스트에 항목이 생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난 과오를 온전히 되돌아보고 생생히 마주해야 하는 이유다.

바둑 애호가들에게 높은 가격이 매겨지는 바둑판은 단연 비자목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특히 그중에도 갈라진 균열이 있어야 특급품으로 친다고 한다. 비자목은 상처를 스스로 복원하는 성질이 있어 한번 갈라진 뒤 회복된 바둑판일 때 더 높게 쳐주는 것이다. 

우리 교단도 그와 같이 성장해 나가리라 믿는다. 지난 과오를 온전히 당당하게 마주 할 수 있을 때 말이다. 새로 입교하는 후진들에게 ‘너흰 그런 건 몰라도 돼’가 아니라 ‘똑똑히 기억해 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

/김화교당

[2023년 05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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