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는 옛날 관료들의 표상이었다. 자기 이익을 따지기에 앞서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곧은 심지가 세상을 바로 세웠기 때문이다.

정갑손은 세종이 중용한 인물로,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하고 청렴해 곧은 관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함경도 관찰사로 재임할 때의 일이다.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한 달간 한양을 다녀왔는데, 그사이 향시가 치러져 그의 셋째 아들이 장원 급제자 명단에 올라 있었다. 

정갑손은 즉각 향시 출제위원들을 불러서 셋째 아들의 합격을 취소시켰다. 물론 출제위원들은 ‘채점은 공정했고, 장원 자격이 충분했다’며 항변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셋째 아들을 불러 ‘향시쯤이야 장원을 하고도 남을 실력을 알고 있지만 여기서는 아니다’라고 타일렀다. 이에 그의 아들 역시 조용히 머리를 끄덕이며, 외가가 있는 경상도로 내려가 향시에 응시해 장원을 했다. 그리고 이듬해 한양에서 치러진 과거에서도 장원 급제해 어사화를 꽂았다. 이렇게 극도로 청렴했던 정갑손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초가집에서 평생토록 비단 이불 한 번 덮지 않았다고 한다.

하물며 관료도 이러할진대 종교인에게 청렴은 당연지사다. 원불교 창립기인 소태산 대종사 시대를 살펴보면 허례허식 폐지와 기념의례를 단순화함으로써 청빈의 삶을 자랑으로 삼았다.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 결혼예복으로 삼았는가 하면, 외출복을 공용으로 장만해 외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이 번갈아 착용했으며, 절약한 비용을 모아 공도사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소태산 당시에도 새는 바가지는 있기 마련이다. 이를 경책한 것이 대종경 교단품 14장에 담겨있다. ‘한 제자 총부 부근에 살며 교중의 땔나무 등 소소한 물건을 사가로 가져가는지라,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교중 살림이 어렵더라도 나무 몇 조각 못 몇 개로 큰 영향이 있을 것은 아니나, 여러 사람의 정성으로 모여진 물건을 정당하지 못하게 사사로이 소유하면 너의 장래에 우연한 재앙이 미쳐 그 몇 배의 손해를 당할 것이므로, 내가 그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미리 경계하노라.”’

이처럼 자칫 방심하면 공중사를 핑계 삼아 사익을 채움으로 인해 재앙의 구렁에 빠지기 쉬운 게 종교인이다. 곧, 어쩌다 관운이 좋아 책임질 자리에 올랐지만 그 직위만 누리면 ‘직책 도둑’이 되기 쉽고, 일은 뒷전에 불평만 늘어놓다 보면 ‘월급 도둑’이 되며, 어느 집안 누구 자손으로 편한 직책을 좇다보면 ‘인연 도둑’이 되고, 아집과 고집으로 능력 밖의 일을 주장하다 보면 ‘인재 도둑’이 되며, 본래 업무는 등한시하면서 가욋일이 먼저라면 ‘시간 도둑’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교단에 살면서 공중사를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에 벌어지는 과오다. 내가 교단이 아니라 ‘교단일이 내 일’임을 명심하자.

[2023년 05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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