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관 교도
여도관 교도

[원불교신문=여도관 교도] 천지가 없다면 만물이 있을 자리가 없어 생명이 살 수 없고 인간이 생겨날 수도 없다. 인간이 자신이 태어난 자리에서 하늘과 땅의 은혜를 받아 쌓아 올린 것이 문명이고 문화다. 그래서 세계 각지의 삶의 방식은 천지은에 따라 이미 결정됐다. 

문명은 1만 년 전 수렵 채집에서 농업으로 이동하며 시작됐다. 인간이 재배 가능한 식물 중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에 가장 적합한 종을 선택해 경작한 것이 농업의 시작이다. 많은 식물 중 밀이나 벼 같은 곡물이 선택된 이유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고, 탄수화물이 풍부해 높은 열량을 제공하며, 저장이 쉬워 식량 수급이 어려운 겨울까지 생존을 돕기 때문이다.

벼는 물과 따뜻한 날씨를 좋아해 연강수량 1,000㎜ 이상 몬순기후에서 재배되고, 밀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거나 건조한 지역에서도 재배가 가능하다. 습하고 따뜻한 동아시아에서 벼농사를, 건조하고 쌀쌀한 유럽에서 밀농사를 짓게 된 것은 천지가 정한 필연이다. 벼는 생산성이 높아 종자 대비 40~50배를 수확하는 반면 밀은 4~5배로 차이가 크고, 같은 면적에서 1.7배 더 수확한다. 벼는 더 적게 심어도 더 많이 수확할 수 있어 많은 가족을 부양할 수 있으니 많이 낳아 키웠다. 대항해시대 이전 인류가 농업에만 의존하던 1,500년 경 중국의 인구가 1억 명이 넘어갈 무렵에도 비슷한 면적의 유럽 인구는 절반 수준인 5천만 명 정도였다. 동양의 부모은이 두터운 것은 쌀 덕분이다.

벼농사에 필수적인 물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공동협력이 필수다. 제방을 쌓고 관개를 위해 물길을 내는 일은 혼자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반면 밀은 물 없는 맨땅에서도 잘 자라고, 노동력도 벼농사의 절반 정도여서 이웃의 도움 없이 홀로 경작이 가능하다. 수천 년의 동서양 농경방식 차이로 공동체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가 자리 잡았다. 동양에서 상부상조 동포은이 당연한 것도 벼농사 때문이다.
 

우리는 척박한 환경을
사은의 힘으로 극복해
민주주의 이룩한 민족.

벼와 밀의 생산력의 차이가 정치시스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추론해 본다. 정치라는 것이 생산된 자원을 공평하게 나누기 위한 사회적 합의임을 감안하면, 부족한 자원 하에서 더욱 활발한 분배 제도의 논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전통적인 밀농사 지역인 유럽이 벼농사 지역인 아시아에 비해 민주주의가 더 발전했다. 같은 유럽이라도 농업 생산성이 높은 남유럽 보다 척박한 북유럽의 정치와 복지제도가 더 진보적이다. 

한국은 벼농사 지역 중 유일하게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다. 중국과 인도, 동남아 전역은 정치와 경제 모두 후진적이며, 일본의 경우 경제발전은 수긍해도 정치가 선진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벼농사 지역 중 한국만이 유일하게 민주주의를 성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민족이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벼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대륙의 동쪽 끝에 있으니 편서풍의 영향으로 극단적 대륙성 기후라 춥고 벼농사 지역 중 가장 위도가 높다. 게다가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넘어 만주로 쫓겨가서도 그 척박한 땅에 벼를 심었다. 이를 본 서양 선교사가 “이것은 농사가 아니라 원예다”라고 말할 정도다. 

같은 벼농사 문화권이라도 다모작이 가능해 생산이 충분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어려운 환경에서 농사를 짓는 우리는 자연스럽게 분배 제도, 즉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법률은 역시 그 뿌리는 벼농사다. 

양곡관리법 관련해 ‘식량안보의 위협이니,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한다느니’ 많은 주장이 있지만, 쌀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고 사은의 현신(現身)이다. 사은을 알면 바른길이 보인다. 농업정책이 정치적 지지와 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닌 쌀과 농가를 살리는 바른길을 찾길 바란다.

/강남교당

[2023년 05월 2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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