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회상을 지키는 높은 고목처럼 장구히 교단을 짊어져 왔던 스승, 예타원 전이창 원정사(睿陀圓 全二昌 圓正師). 이제 무겁게 짊어졌던 공도사업의 법장을 후진들에게 맡긴 채 먼 피안의 수양길로 떠났다. 

큰 어른이었던 예타원 전이창 원정사는 원기108년 5월 30일 밤 11시 19분 원병원에서 입적했다. 육일대재를 이틀 앞두고 소태산 대종사의 기일을 따라 기어이 큰 스승님 곁으로 가고야 말았다. 

제생의세의 대서원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어 지극한 수행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80여 년이었으며, 세수 98세다. 

늘 묵묵히 공도에 헌신한 가운데 신성의 공부길로, 큰 법력을 갖추었음에도, 흔적 없는 무명 성자였던 예타원 원정사.  만대를 통해 전무출신의 사표가 된 예타원 선진의 생애를 후진들은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의 숨은 성자로 마음속에  새기고 있다. 

31일 열린 긴급 임시수위단회에서는 예타원 원정사의 장례를 원불교전체장으로 결의했다. 원불교전체장은 원성적 정특등 유공인에 대한 장례로, 원불교교단장은 유연 교당·기관이 상주가 되지만 원불교전체장은 전 교당과 전 기관, 전 교도가 상주가 된다.
예타원 원정사의 법랍은 83년 2개월로 공부성적은 정식출가위, 사업성적은 정특등 5호, 원성적 정특등이며, 특별유공인으로 원불교전체장으로 장례를 모셨다.

 

오직 공심, 그 서원 하나로 평생을 일관
예타원 원정사는 영산선원 서기로 근무를 시작해 삼동원 원장으로의 퇴임까지 50여 성상을 공도에 헌신했다. 도시와 지방, 총부와 기관을 두루 거치며, 처한 곳마다 법을 위해 몸을 잊었고, 공을 위해 사를 놓았다.

수계농원에서는 출장법회로 수계교당 창립의 기틀을 마련했고, 동산선원과 중앙훈련원에서는 대산종사의 뜻을 받들어 신축에 소임을 다했다. 서울회관 문제로 교단의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오직 정성과 공심으로 이뤄낸 성과였다. 

신도안 삼동원이 도곡으로 옮겨져 다시 시작할 때는 만난의 어려움을 오직 기도와 적공으로 이겨냈으며, 건축불사와 훈련불사에 심신을 다 바친 그 모습은 참다운 공부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스승님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중한 일을 하면서도 오히려 ‘무슨 크고 거창한 일이나 하고, 그 일이 교단의 전부인 것처럼 드러내지 않고, 말 없고 흔적 없이 조용하게’라는 당신의 심계를 실천했다. 또 종명을 천명으로 알고, 공사를 시작할 때는 백 년을 살 것 같이 정성을 쏟다가도 놓아야 한다면 내일 떠나도 미련 두지 않았던 공심. 그 가운데 지극정성의 기도로써 이사병행(理事並行)의 실천을 나투신 삶이었다.
 

동산선원·중앙훈련원 신축, 삼동원이전 건축·훈련불사 이뤄
위법망구 위공망사의 숨은 성자, 오직 공심으로 일관했던 생애 
“여래를 표준 삼아야”, 한결같은 공부심 후진들에게 모범

“꼬리 날까 싶구나”
예타원 원정사는 16세에 이정만 대봉도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만났다. 영산학원생 대표로 총부 교리강연대회에 참가한 어린 시절. ‘인간대사보다 생사대사가 더 큰 일임을 알아 영생을 보은하며 살겠다’는 강연 발표를 듣고 소태산 대종사는 크게 칭찬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스승인 내 앞에서도 발을 괴고 앉거나 담뱃대를 무는 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내 법이 잘 건넬까. 언제나 제자다운 제자를 만들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오늘 저 조그마한 아이의 입에서 생사대사의 진리를 듣게 되니 감회가 새롭다. 이창이에게 특등상을 줘야겠다”고 말씀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꼬리 날까 싶구나”하면서 자만하지 않도록 경계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이후 차츰 발심이 나고 신심이 생겨 전무출신 지원서를 냈다. 영산선원 대각전에서 법신불전에 사배를 올리고 출가식을 하면서 영생의 서원을 다짐했다. 

그렇게 출가 서원을 세웠던 그때부터이지 않았을까. “꼬리 날까 싶구나”했던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 아마 평생의 법문으로 받들었을 것이다. 조그마한 사심이라도 작은 상이라도 날까 항상 스스로 반조했기에 오직 공심으로써 서원을 일관한 삶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여래를 표준 삼아 살아야 한다”
예타원 원정사는 병약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는 누구이고, 왜 아플까’하는 한 생각으로 ‘내가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슬플 것도 없을 터인데, 이 의식하는 나는 없어질 수 없는 것인가’하며 성리에 궁극적인 물음을 가졌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생사대사의 연마가 깊었고, 기도 정진에 정성이 컸다. “사람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는 학문적인 실력도 아무런 힘이 없고, 오직 마음의 힘이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 마음의 힘 곧 법력을 갖추어야겠다.” 그 한 깨달음으로 남모르는 깊은 적공을 쌓았다. 후진들에게는 <죽음의 길을 어떻게 잘 다녀올까>와 <생과 사의 큰 도>등의 저서를 남겨 공부의 길을 밝혀주기도 했다.

대산종사는 예타원 원정사를 말씀할 때 “예타원 법사는 16살에 출가해 자기의 성태를 장양했다. 남모르게 적공해 하나를 쌓았기 때문에 선망의 대상이 됐다”고 했다. 

퇴임 후 수도원 정양 생활 속에서도 놓지 않은 한결같은 공부심은 후진들에게는 경책이었다. 수도에 방심하지 말라는 모습처럼 고령의 당신이 게으름 없는 수행으로 손수 모범이 됐다.

“우리가 여래가 되자고 온 사람들인데, 여기가 여래원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이 좋은 곳에서 여래를 표준 삼아 살아야 한다. 소태산 여래께서 그렇게 법을 만들어 주셨다. 총부도 교단도 다 여래원이 돼야 한다. 하고 안하고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수도원에서 하신 그 말씀. 예타원 원정사의 자비로운 음성이 지금도 느껴진다.
 

사진= 장지해·이여원 기자

[2023년 06월 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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