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현 교무
강동현 교무

[원불교신문=강동현 교무] 군(軍)행사 가운데 의미 있는 종교의식이 있다. ‘6.25전사자 유해발굴 개토식과 영결식’이다. 아직 산야에 잠들어 있는 전사자만 약 12만 명에 이른다. 이들을 찾기 위한 거룩한 사업이 ‘6.25전사자 유해발굴’이다. 매년 5월 말에 개토해 6월까지 진행된다. 사업이 종료되면 발굴된 유해는 영결식을 거쳐 신원확인에 들어간다. 이 사업의 종교의식을 할 때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무명용사(無名勇士)’다. 전사자들은 유족의 품에 돌아가기 전까진 ‘무명용사’가 된다. 그런데 무명용사로 불리고 싶은 전사자가 있었을까?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전사자. 간절할 것 같다.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길.

이 애달픈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유명한 가곡이 있다. ‘비목(碑木)’이다. 이 가곡의 배경지가 7사단 작전구역인 백암산이다. 이 곡의 작사자는 한명희 선생이다. 실제 7사단 백암산 GP에서 군복무 중에 봤던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생각하며 썼다고 한다. 그래서 이 가곡을 들으면 무명용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진다. 그 마음을 따라 염원한다. 6.25전사자들의 완전한 해탈천도를. 그리고 이와 같은 희생은 반복되어선 안 된다고, 오히려 그 거룩한 희생이 빛나야 한다. 평화와 통일로서 말이다. 한반도를 넘어 이 세상에 구현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무명용사는 더 이상 무명용사가 아니다. 무명성자(無名聖子)가 되는 것이다. 

그 맥락에서 가슴 깊이 모셔지는 스승님이 있다. 최근 열반하신 예타원 전이창 종사다. 군종장교로 임관한다고 하니 ‘세계평화’란 글귀와 함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문답감정을 받을 때마다 “무명성자가 돼라”고 독려해주셨다. 그리고 덧붙이길, “나도 무명성자를 표준한다”고 하셨다. 그런데 숙제 검사도 못 받고 이별을 맞았다. 

돌이켜 보니, 군종장교로 임관한 지 햇수로 10년째다. 다가오는 6월 30일이면 전역을 하게 된다. 얼마 안 남은 시간이다. 숙제를 잘 풀었는지 반조해 봤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염원이 간절했을까? 무명성자를 표준하며 속 깊은 공부를 했을까? 자신 있게 “네”라는 대답이 안 나온다. 덧없이 시간만 지났다.

어렴풋이 스승님 처소에 걸려있는 사진이 생각난다. 그 사진의 주인공은 소태산 대종사였다. 의자에 앉아 지긋이 그 진영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을 새기며 군종장교로 활동한 10년을 반조한다. 잘된 일은 내가 잘해서 된 줄 알았다. 못된 일은 주변 여건만 탓했다. 알고 보면 잘된 일은 사은(四恩)의 도움으로 가능했고, 못된 일은 사욕(私慾)으로 생긴 결과였다. 그렇다면 사은의 도움이 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소태산 대종사의 경륜인 ‘일원대도 교법’ 때문이었다.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한 일이었다. 내가 한 바가 없으니 무명(無名)인데 내가 했다고 착각했다. 완벽한 무명(無明)이다. 

이 감상을 느끼고 보니 묘한 마음이 생긴다. ‘은혜 속에 보낸 10년이구나’라고. 그리고 이 시기가 더 은혜롭다. 법으로 이끌어 주는 스승님을 느낄 수 있음에 말이다. 존경과 보은의 마음을 담아 부족한 이 감상을 스승님의 영전에 올린다.  

<정산종사법어> 응기편 16장 법문과 함께 소태산 대종사를 가슴에 모신다. “전이창(全二昌)이 묻기를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하여 어떠한 어른이 제일 큰 발견을 하여 주셨나이까.’ 답하시기를 ‘제일 큰 은혜를 발견하여 주신 어른이니라.’”

/군종교구 사무국장

[2023년 06월 0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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