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예로부터 인재를 등용하는 기준이 신언서판이라는데, 말과 글과 판단력이 좋고, 아는 것도 많아 무엇이나 척척 답을 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 사는 일에도, 근본적인 진리에도 걸림 없이 아는 이는, 스스로도 자유롭겠지만 세상의 빛이 되는 귀한 사람이다. 

사람 사는 일을 시비이해, 근본적인 이치를 대소유무라 한다. 대소유무 시비이해를 낱낱이 설하자면 석 달 열흘로도 모자랄 테고, 금세 하품 나올 게 뻔하니 이 정도로 넘어간다.

이치에는 밝은데 세상일에는 어두운 사람이 있고, 세상일에는 밝은데 진리 쪽에는 전혀 생각 없는 사람도 있다. 이치와 일에 다 통달해야 지혜롭고 쓸모 많고 보은 잘하고 괴로움이 없다. 선후를 논하자면 먼저 이치에 밝아야 하고, 그 이치를 바탕으로 일에도 능통해야 한다. 불교계 전문용어로 이치에 통달하는 것을 이무애, 일에 걸림 없는 것을 사무애라 한다. 어디 가서 이런 말 좀 써주면 약간 있어 보인다는 것.

우주적 이치에는 밝은데 세상일에 눈감고 무관심하면 스스로는 편할지 몰라도 주변 사람들이 엄청 괴롭다. 입만 살아 말은 청산유수인데 생활이 꽝이면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비가 와서 마당의 곡식이 떠내려가도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서, 여기에 있으나 저기로 떠내려가나 둘이 아니니 잃은 것이 아니라는 소리나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진리는 생활에서 잘 활용되어야 가치가 있다. 참된 도인은 세상일에도 능한 활불이어야 하며 매사에 시비이해를 잘 판단해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아야 인간사 시비이해도 제대로 분간할 수 있다.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은 일원의 진리, 자성이다. 옳고 그름은 진리, 한마음, 자성 자리로 돌아가 판단된 것이어야 한다. 단절된 나를 떠나 자성에서 밝히는 것이 옳은 것이며, 진리를 떠나 단절된 내가 구하는 것이 그름이다. 이해(利害)도 마찬가지다. 하나인 자리에서 판단하고 행해야 궁극적으로 이로운 것이며, 단절된 나를 중심으로 구하면 아무리 많은 이득이 와도 본질적으로는 해로움이다.
 

시비이해 정확한 판단은 
오직 하나인 자리를
비춰야 가능.

견성 못하면 불가능하다.

시비이해의 정확한 판단은 오직 하나인 자리를 비춰야 가능하니, 견성을 못하면 불가능하다. 견성했다고 모든 진리가 동시에 사통오달 되는 것도 아니라서, 두루두루 다 밝히려면 계속되는 진리연마가 필요하다. 

견성을 못한 이들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견해라도 여럿 가운데 하나의 주견일 뿐이며, 대중이 동의하는 견해라 해도 마찬가지로 대중들의 주견이다. 대중이 옳다고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 어디에서는 옳은 것이 어디에서는 그르며, 그때는 옳았는데 지금은 틀린 일이 비일비재하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은가. 

참 공부인은 그 판단이 절대적으로 옳아서라기보다 지금 여기에 통용되는 법이니 능히 맞춰줄 줄 알고 능히 무너뜨릴 줄도 알며, 시비를 밝힐 때 밝히고 놓을 때 놓을 줄 알아, 자기의 주견에 집착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옳음도 이로움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음을 알고 무엇에도 끌리지 않는다. 세상일과 진리를 두루두루 미리 알아 일과 이치가 훤하니 두려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어 자유롭고 평안하다. 무엇이든 반드시 이래야만 한다며 시비에 고정관념이 강한 이는 사리에 어두운 사람이며, 반드시 자신과 주변을 괴롭게 할 것이다. 

모르는 게 병이다. 사리에 다 밝으면 큰 보은자, 참 지도자 자격이 있으며, 고락에서 자유롭다. 이생만 아니라 영생의 혜복과 고락을 좌우하는 사리연구 수행 잘하고 계시는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6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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