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이제는 강원도도 가까워졌다지만, 태백은 여태 굽이굽이 산속이다. 백두대간 등줄기, 해발 800m에 자리한 곳. 그토록 깊고도 높은 동네, 그래서 그 이름도 크고(太) 밝은(白) 태백이다. 달이 뜨면 온 동네에 우렁우렁 울린다는 태백에 일원상이 뜬 것은 원기75년(1990), 선교소 인가 4년째 되던 해였다. 아예 신축을 하니 대법당도 대법당처럼, 생활관도 생활관처럼 지었다. 이 집을 올린 당시 인부 중에 참 지중한 인연이 있었다. 원불교의 ‘원’ 자도 모르고 교당을 지어 올린 이정선 교도다. 벽돌로 시작한 원불교와의 인연도 딱 태백교당 나이와 같은 33년, 교당은 그의 일터요 집이요 위로였다. 

공사 현장에 업고 간 다섯 살 막내
남편(故 홍성필 교도)가 광산에서 다쳐 일을 못 하게 되자, 30대의 그가 가장이 됐다. 날로 커가는 아이가 셋, 게다가 다섯 살 아이는 심장이 아팠다. 귀천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던 그는 공사장에서 지게도 지고 시멘트도 섞었다. 맡길 곳 없던 막내를 업고서였다.
“현장에 애가 오니 다들 걱정하고 싫어하죠. 근데 교당 짓느라 마음들이 좋았을까요, 현장소장에게 얘기했더니 자기가 봐준다며 데려오라는 거예요. 거기서 장경진·박덕규 교무님을 만났죠.”

그해 태백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렸는데, 가고 싶었던 막내가 “형아는 키가 작으니까 엄마가 업어달라”며 울었다. 박 교무가 조심스레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했고, 아이는 교무 무등을 타고 구경을 다녀왔다. 그날 아이 숨소리가 심상찮음을 눈치챈 박 교무가 원불교 심장병어린이돕기를 알려줬다. 당시 교학과 학생들이 한 달 동안 자전거 국토 순례를 하며 직접 모금도 하고, 전국에서 보내준 성금으로 어린이들을 도왔었다. 그 정성이 세계로 뻗어 원불교 대사회 봉공의 주춧돌이자 대들보가 됐다. 그때 교당에서 신청을 해줘 수술이 잡혔고, 일하는 그 대신 마침 퇴원한 남편이 익산에 갔다.

“수술은 잘 마쳤는데, 심장이 뛰지 않더래요. 교무님이 전화 와서는 ‘쌀밥 한 그릇 해오라’고 하셔서 알았죠. 며칠 뒤 김기홍 교무님이 남편과 함께 유골함을 들고 올라오셨고, 재를 함께 지내주셨어요.”

막 완공된 태백교당에서의 첫 천도재였다. 그는 그토록 정성스러운 재를 보고 “아이가 더 좋은 인연으로 건강한 몸으로 오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리도 천도를 잘 받게 하려고 엄마는 교당 벽돌 하나하나를 쌓았던 것일까. 그제야 아이는 법명도 받았다. ‘영천’이었다.
 

심장병어린이돕기 인연…태백교당 첫 천도재의 재주
힘든 고비마다 교당에서 위로, 마음밭 풀뽑기 적공
하루도 거르지 않는 감사일기, 갚을 게 많아 바쁜 마음

"와서 교당 좀 지켜주세요”
“정선님, 제가 좀 힘들어 그러는데 낮에 교당 청소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영천이를 가슴에 묻고 넋이 나간 그를 장경진 교무가 추슬렀다. 교당은 늘 반짝반짝했으나 그에게 일을 주고 가까이 챙기고자 했던 마음이었다. 그는 눈만 뜨면 교당에 가서 티끌이라도 주웠다. 여름이면 “정선님네 텃밭 호박이 제일 맛있으니 두 개만 팔아라”며 하나에 오백 원씩 쳐주었다. 장에 나가면 백 원이면 살 수 있었단 걸,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간고한 살림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받은 돈을 모아 헌공금으로 냈다. 

“사람들이 ‘교당에 산다’고들 하는데, 저는 진짜로 살았어요. 남편이 병원에 들어가면, 교무님이 ‘총부에 다녀와야 한다’, ‘교구에 가야 한다’며 집 좀 지켜달라 하셨어요. 제가 일하는 동안 애들만 집에 두기 어려우니 교당에 있으라는 거죠. 그때는 그 마음도 모르고, ‘교무님들은 저렇게 출장이 많구나’만 생각했죠.”
 

교당을 집 삼고 안식처 삼아 살기를 몇 년, 그는 식당에 취직하면서 교당에 못 나왔다. 20년 가까이 일하던 사장이 그에게 식당을 물려주고 떠났을 때, 그는 ‘내 가게가 생겨서’보다 ‘이제 교당 갈 수 있어서’ 더 기뻤다. 그렇게 법회도 보고 알뜰하게 장사하기를 8년, 이제 살만하다 싶었다. 

“어느 날 허리를 다쳤는데, 핀을 8개 박을 정도로 큰 수술을 했어요. 그즈음 남편이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해 열반했고요. 참 이상하죠, 그 해 제가 집을 샀거든요. 평생소원은 이뤘는데, 저는 혼자된 데다 움직이지도 못했죠.”

어쩌면 이런 일들은 한 번에 오는 것일까. 다시, 모든 것이 고통이고 아픔이었다. 상을 치르고, 새집에 살림을 들이고, 움직일 만해지자 그는 교당에 가서 줄줄 울었다. 한참 울고 나서 창밖을 보니 잡초가 무성한 교당 텃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풀을 뽑기 시작했다.
 

교당 텃밭 풀 잡는데 7~8년
“처음엔 교무님, 교도님들이 말렸죠. 근데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아픈데 풀을 뽑으면 안 아픈 거예요. 풀은 아침에 뽑아도 저녁 되면 또 나와 있고, 매일 뽑아도 하루만 거르면 훅 올라와요. 원래 풀 잡는 데 10년은 걸린다고 했으니까요.”

어쩌면 풀들은 그의 눈물이자 경계였고, 또한 이생의 빚이었을까. 7~8년 하니 ‘이제 풀이 좀 잡혔다’는 그. 그동안 허리 수술만 2번 더 했고, 목 수술, 눈 수술, 최근엔 하지정맥류도 생겼다. 하지만 이제는 깔끔해진 밭처럼, 그의 마음도 순하게 감사로 채워졌다. 

“5년 전 조정우 교무님이 오시고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한글 받침도 덕분에 배웠지요. 쓸 게 없다고 했더니 한 일이라도 쓰라셔서 처음엔 ‘오늘 병원 갔다’, ‘오늘 풀 뽑았다’만 썼어요. 그러다 코로나19 때 교전도 쓰고, 쌓아뒀던 <원불교신문>도 한 자 한 자 꼼꼼히 봤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뽑는 풀처럼, 일기 역시 매일 감사 거리를 빼곡히 쓴다. 원불교를 못 만났으면 원망심으로 살았을 삶이니 갚을 게 많다며 마음도 손도 바쁘다. 온통 고통이자 경계였으나 그마저 감사로 갊아진 삶,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고 풀을 뽑고 일기를 쓰는 오롯한 삶. 

여기는 강원도 태백, 그곳에는 깊고도 높은 위대한 마음이 살고 있다.
 

[2023년 6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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