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덕진 교무
오덕진 교무

[원불교신문=오덕진 교무] 반갑습니다. 육일대재로 시작하는 6월에, 추모의 정성을 바치고 싶은 인연과 나 자신을 위해서 ‘열반 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설’을 공부하려고 합니다. ‘열반 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설’은 원기20년(1935)경 소태산 대종사께서 직접 지으신 경문입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열반 ‘전’과 열반 ‘후’에 후생길, 사람이 죽은 후에 가게 되는 길을 인도합니다. 

‘열반 전후에 후생길 인도하는 법설’ 첫 문장은 “정신을 차려 부처님의 법문을 잘 들으소서”입니다. 경계를 대해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다행스럽게도 소태산 대종사께서 정신 차리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경계를 대할 때마다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항상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만 잡아갈지니라.”(<정전> 제3 수행편 제7장 무시선법) 죽음의 경계를 대했을 때는 “죽음 공부할 때가 돌아온 것을 염두에 잊지 말고 끌리고 안 끌리는 대중 ‘만’ 잡아가는 것이구나!”하고 한 마음 챙기면 될 것 같습니다.

‘죽음의 경계를 대했구나. 죽음 공부를 할 때구나’하고 정신을 차린 다음 할 일은 바로 부처님의 법문을 잘 듣는 것입니다. 잘 들어야 할 부처님의 법문은 “이 세상에서 영가가 선악간 받은 바 그것이 지내간 세상에 지은 바 그것이요, 이 세상에서 지은 바 그것이 미래 세상에 또 다시 받게 될  바 그것이니 이것이 곧 대자연의 천업이라”입니다.

‘업’이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업을 사실적으로 정의해주셨습니다. “작업이라 함은 무슨 일에나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작용함을 이름이요.”(작업 취사의 요지)

‘작업(作業)’의 한자를 직역하면 ‘업을 짓다’입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눈․귀․코․입․몸․마음을 작용하는 것이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몸과 마음을 사용하고, 몸과 마음을 사용하면 그에 따른 결과가 생기는 것은 대자연이 묘하게 작용하는 원리, 대자연의 천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자성의 본래에 바로 대조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법

그런데 대자연의 천업을 인정하기 싫은 것 같습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은 오직 상생·선연·진급·부귀·건강·장수·무탈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오직 상생·선연·진급·부귀·건강·장수·무탈만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기침을 심하게 하는 병으로 고생하셨고, 둘째 아들을 일찍 여의셨습니다. 일제에 수많은 억압과 제재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조전권 선진께서도 이 점이 궁금했던지 소태산 대종사께 여쭙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내가 알고는 죄를 짓지 아니하려고 공을 들인지 이미 오래이나, 다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화할 때에 혹 완강한 중생들의 사기 악기가 부지중 억압되었던 연유인가 하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정당한 법을 가지고 자비 제도하시는 부처님의 능력으로도 정업(定業)을 상쇄(相殺)하지는 못하고, 아무리 미천한 중생이라도 죄로 복이 상쇄되지는 아니하나니라. 그러나, 능력 있는 불보살들은 여러 생에 받을 과보라도 단생에 줄여서 받을 수는 있으나 아주 없애는 수는 없나니라.”(<대종경> 제5 인과품 8장) 소태산 대종사와 같은 성자도 마음을 공부하는 우리와 똑같이 수많은 생을 살면서 상생과 상극의 인연을 맺고 진급과 강급의 흐름 속에 사는 것이구나 알아집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나와 무엇이 다른가?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해서 마음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합니다. 자성은 우리 각자의 마음이고 본모습입니다. 자성의 본래를 소태산 대종사께서 가장 쉽게 표현해주신 법문이 있습니다. 바로 일상수행의 요법 1~3조입니다.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요란함을 없게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정을 세우자.” 원래 요란하다, 요란하지 않다 하는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묘하게 있어지는 것이 자성의 본래입니다. 부처와 조사는 이 자성의 본래를 깨달아 얻어서 천업을 돌파하고 육도와 사생을 자기 마음대로 수용합니다.

천업을 돌파한다는 것은 뭘까? “말씀하시기를 ‘정업을 면치 못한다 함은, 이미 정해진 업에 대하여는 죄복을 주는 권능이 상대방에 있기 때문에 한 번 결정된 업은 면할 도리가 없이 받게 된다는 말씀이요, 천업을 돌파한다 함은, 그렇게 주어지는 업이라도 받는 이는 곧 자신이기 때문에 마음의 자유를 얻은 이는 그 죄복에 마음이 구애되지 아니하고 항상 그 마음이 편안하므로 곧 그 업을 자유로 함이니 이것이 천업을 돌파함이니라’.”(<정산종사법어> 제14 생사편 3장)

천업을 돌파한다는 것은 지은 대로 받는 것을 깨부수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부처와 조사는 ‘심지는 원래 죄와 복의 분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죄와 복이 다 분별이 있어지는구나’하고 바로 아시는 것 같습니다. 혹은 은혜가 해에서 나오기도 하고(恩生於害), 혹은 해가 은혜에서 나오기도 하는 이치(害生於恩), 음양상승의 이치를 알아서 지금의 상태에 속지 않고 그 사람이나 그 일에 불공하는 것 같습니다. 긍정적 사고는 부정적 사고까지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혹은 강급이 될 때 이 또한 진급으로 볼 줄 아는 것이 원만한 진급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경계마다 일상수행의 요법으로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열반 전이나 열반 후나 마음의 자유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대명교당

[2023년 6월 7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