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균
윤덕균

일원 30상(염화시중(拈華示衆) 상): 마하가섭이 빙그레 웃은 이유는

마하가섭(摩訶迦葉)은 석존이 열반에 든 후 ‘1차 결집’을 주도, 최초의 불교 경전을 펴내고 교법을 통일한 10대 제자 중 으뜸이다. 세존의 마음을 그대로 본받은 인물로도 일컬어진다. 탐욕과 집착을 버리고 번뇌를 털어내는 불교식 수행법 ‘두타행’을 가장 잘 지킨 수행자다. 두타행은 ‘하루에 한 번만 먹는다’, ‘깨지고 헌 옷만 입는다’, ‘나무 밑에서 지낸다’ 등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엄격하게 수행하는 방법이다. 

석존과 가섭 사이에는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이 있다. 삼처전심은 석존의 49년간의 설법 중에 3곳에서 가섭에게 말씀으로 전하지 않고 행위로 보여준 설법이다. 최상 근기인 가섭만이 그 뜻을 알아챈 불교 선종의 근본적 선지다. 첫 번째 전심은 다자탑의 설법에 누더기를 입고 뒤늦게 들어온 가섭에게 부처님이 자기 자리 절반을 양보한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전심은 부처님이 열반 후 가섭이 관 주위를 세 번 돌고 세 번 절하자, 관 속으로부터 두 발을 밖으로 내밀어 보였다는 사라쌍수곽시쌍부(沙羅雙樹槨示雙趺)가 그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심은 두 번째 전심으로, 널리 알려진 염화시중 미소다. 이는 석존이 영축산에서 설법할 때 일이다. 그때 석존은 말없이 연꽃 한 송이를 조용히 들어 보였다. 모두가 영문을 몰라 할 때,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석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말했다. “나에게 정법안장, 열반묘심, 미묘법문, 불립문자, 교외별전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말과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가 전달된 것이다. 이른바 ‘불로 불을 붙이고 마음으로 마음을 새기는’ 불교식 전수의 정수로, 이심전심이다. 두 분 사이의 불법 전수는 말로 하지 못하는 것을 전하는 교외별전의 증거가 됐고, 선종을 열게 했다. 
 

그런데 세속인의 관심은 석존이 연꽃으로 가섭에게 전한 선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81,340경의 불경 어디에도 선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다만 두 분 사이에 텔레파시가 통해 전해졌다고 할 뿐이다. 그렇다면 혹 꽃이 아니라 꽃을 들고 있는 손가락에 실마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대중이 모두 꽃에만 관심이 있을 때 가섭은 석존이 가리키는 손가락에 유의한 것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부처의 수인(손가락 모습)이 매우 중요하다. 비로자나불은 지권인, 미륵불은 시무외인과 여원인, 아미타불은 설법인, 석존은 항마인이 주이지만 선정인, 전법륜인을 한다. 만일 부처님의 수인이 약기인이라면 약사불이다. 

염화시중의 미소에서 세존의 수인은 전법륜인에 가깝다. 전법륜인은 석존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할 때의 수인으로 불교의 법륜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세존은 연꽃과는 상관없이 전법륜인, 즉 요즈음의 일원상 수인으로 ‘OK(맞지)?’ 하고 세존은 물으셨고 가섭은 ‘OK(맞습니다)’라고 미소로 대답한 것은 아닐지?
 

말과 글이 아닌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가 전달된 것

일원 31상(세인(世認) 상) 기독교 장로 김재영씨가 원불교에 일원상 수석을 기증한 까닭은

2004년 8월 31일은 원불교의 일원상이 세인에 의해 원불교의 것으로 인정된 세인절(世認節)로 기념할 만한 날이다. 무게가 3톤에 이르는 일원상 문양 암석이 이웃 종교인에 의해 기증돼 중앙총부에 둥지를 튼 것이다. 종교의 울을 넘는 따뜻한 마음의 주인공은 전주시 내산교회 장로로서 토목건설업을 하는 김재영 씨(55)다. 

김 씨는 전라북도 산서에서 장수를 넘어가는 비행기재의 도로 선형변경 확·포장 공사를 하는 도중 일원상 문양이 선명한 암석을 캤다. 많은 사람이 “돈을 줄 테니 바위를 달라”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원광대 경영학부에 재학 중이라 원불교를 알고 있던 김 씨는 원불교의 일원상이 담긴 신령스러운 바위란 생각해 서둘러 흙을 덮었다. 그리고 인터넷에 이런 사정을 알리며 원불교인에게 이 바위를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8월 말, 유덕종 교무는 인터넷에서 이 글을 발견하고 황직평 원로교무에게 알렸다. 황 원로교무는 당시 김장원 재정산업부장과 함께 김 씨에게 연락을 취했고, 8월 31일 현장에서 이 암석을 실어 9월 1일 새벽 중앙총부 원불교 역사박물관 입구에 안치했다. 

한 지질전문가는 “2.5m×1.5m 규모의 이 암석은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졌으며 일원상 부분은 흰 석영 재질로 계속 자라는 돌”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화강암이 오랜 세월 동안 압력을 받아 편마암이 됐고 그 표면에 물이 흘러 돌아 규산염의 침전으로 결정이 됐는데, 일반적으로 일원상처럼 되기는 힘들다”고 한다. 오만년 대운의 불연을 상징하는 일원상 문양 암석도 신비하지만, 이 암석이 이웃 종교인에 의해 기증됐다는 점은 더욱 훈훈하다.(〈원불교신문〉2004.09.10일자 참조)
 

원불교와 불교의 인연은 원기9년(1924) 원불교가 불법연구회로 탄생하면서 시작됐고, 원기33년(1948) 원불교 개교식을 거행함으로써 불교와의 인연을 청산했다. 그럼에도 오직 불교와의 차별화가 있다면 ‘일원상’하나로, 사실 이것마저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역부족인 측면이 있었다. 그런데 세인이, 그것도 기독교 장로가 ‘일원상=원불교 것’이라고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는 측면에서 위 사건은 의의가 있다. 일원상 진리를 지키기 위한 원불교인의 자각을 촉구한다.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중곡교당

[2023년 6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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