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4년 교단 초창기, 당시 뜨거웠던 공부 분위기를 보여주는 총부 예회록 일부를 옮긴다.

‘(소태산) 대종사의 하명에 의하여 선객의 각자 감상을 토로키로 한바, 남자계로 이호춘 군이 “…우리는 나를 떼어버리고 매사 작용 시 오직 자리이타의 공공연한 중도에서 활동하라”는 사자후와, 다음 송봉환 군의 “우리는 원이 커야 한다”라는 옥을 깨는 듯한 열변이며, 김대거 군의 “근묵자 흑이요, 근주자 적이니 우리는 정의의 방면에 종사하여 정의의 습관을 가지라”라는 하늘을 잡고 바위를 치는 우렁차고 또 씩씩한 사내다운 말소리가 청중의 정신을 사무처 깨웠다. 청중의 손바닥은 불에 덴 손같이 화끈화끈 하여짐을 깨달을 때 박수 소리는 금강원에 높아졌다. 사회의 “오늘은 법의 박람회이니, 여러분은 정신을 모아 구경하시라”라는 권사에 일층 장내는 긴장미를 가하였다.’

90년 전, 불법연구회(원불교 전신)이 얼마나 뜨겁고 공부심이 충만했는지 그 일면을 잘 보여준다. 모든 것이 암울한 일제 강점기, 그럼에도 소태산을 따라 모여든 제자들의 구도 열기는 세상을 활활 태우고도 남을 만큼 거침이 없었다. 지금 시대 ‘강연 100℃’보다 더 뜨거운 열기였다.

당시 소태산 대종사 문하에 모여든 제자들의 면면은 가히 천재적 엘리트들이 수두룩했다. 소태산의 법통을 이은 송규는 말할 것도 없고, 더 천재라 평가받던 친제 송도성을 비롯 전음광, 서대원, 박대완, 김대거, 경기여고를 졸업한 법낭 이공주, 한국 고아들의 어머니 황정신행 등등.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박장식 선진이 겸손해 보일 정도다.

사실, 젊은 소태산의 당시 겉모습은 벽지 출신에 가난한 성자에 불과할 수 있었다. 26세에 대각을 이루었다고 하나 딱히 학문의 습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대각 이후의 행적에서는 고경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들을 제자들에게 알기 쉽게 전해준다. 이는 깨침만으로 일시에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깨달음을 이룬 소태산은 이후 불교의 금강경을 비롯 선요·불교대전·팔상록과 유교의 사서와 소학, 선가의 음부경과 옥추경, 동학의 동경대전과 가사, 심지어 기독교의 구약과 신약을 두루 열람했다. 이때가 한창 두뇌회전이 무르익은 20대 중반이니 그 천재성에 더해 모든 경전을 통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태산은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나는 간혹 한가한 때가 있으면 불교 서적을 보는바’라고 서술하고 있다. 대각을 이룬 후에도 공부를 놓지 않는 스승 아래 공부 하는 제자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지사다.

공부하지 않는 종교인은 잿밥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원불교는 본래 공부하는 종교다. 그러니 어찌, 공부 없이 변화·발전되길 바랄까. 마음을 훤히 꿰뚫는 공부, 성리에 토가 떨어지는 공부, 시대를 통찰하고 미래 안목을 환하게 밝히는 공부만이 교단을 다시 부흥시키는 길이다.

[2023년 6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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