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 제아무리 좋은 것도 잘 다듬어 쓸모 있게 만들어야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기왕지사 사람으로 태어나 사는 거 더 가치 있고 쓸모 있게, 심신도 자유자재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으리오.

주변에 보면 아는 건 많은데 실행은 엉망이고 말도 참 안 듣는 사람 한 명씩은 있을 것이다. 참다못해 이들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말이 있다. “알면 뭐하냐고~ 실천이 안 되는데” 

견성은 머리 키우자고 하는 게 아니라 좋은 변화가 나타나게끔 수행을 잘해 결국 성불하는 데 목적이 있다. 성자의 말씀을 그림의 떡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수행은 작업취사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판가름 난다. 여기서 작업이란 노동이 아니다. 먹고 걷고 말하고 잠자고 생각하는 육근의 움직임 일체를 작업, 즉 업을 짓는다고 한다. 시체가 아닌 이상 모든 순간 우리는 업을 짓는다. 취사란 작업, 즉 육근을 움직일 때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라는 의미다. 여기서 정의 불의란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즉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말한다. 수행은 해야 할 것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않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말은 이리 쉬운데 결코 맘대로 안 된다는 게 문제다.
 

견성 못하면
수양 연구 취사를
주견으로 하는 것이지
참 수행이 아니다.

왜 잘 안되냐면, 깊이 찌든 기질과 습관 때문이다. 습관은 하던 대로 살려고 하고 자성의 힘은 약하니 견성 후에도 작정하고 수행하지 않으면 기질과 습관이 이기게 돼 있다. 변화되는 일이 죽을 만큼 힘들기에 정의는 죽기로써 행하고 불의는 죽기로써 끊어야 힘이 생기지, 대~충해서는 결코 안 변한다. 탐진치의 파워는 너무 강력해 수양력이고 연구력이고 할 것 없이 토네이도처럼 모든 걸 한순간에 집어삼킨다. 워낙 순식간에 분출되니 마음 단속반의 출동은 늘 뒷북이다.

한 생 안 난 폭 잡고 오래오래 유무념·일기·주의·조행으로 성찰하고 참회하고 평떼기하면서 작정하고 하지 않으면 원점으로 홱 돌아간다. 견성을 해도 습관과 탐진치를 이겨낼 수 없으니 죽기로써 취사력을 길러가지 않으면 사람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정의와 불의, 옳고 그름은 시대나 지역이나 상황 따라 다를 수 있고, 각자가 생각하는 시비가 다른데 그 기준이 대체 무엇인가. 그건 바로 자성, 일원, 본원, 일심에서 나왔는가 아닌가이다. 자성, 일심에서 나온 것을 정의, 일심을 떠난 것을 불의라 한다. 그러니 자성을 모르고는, 견성을 않고는 정의 불의, 옳고 그름을 분간할 수 없다. 견성 못하면 수양 연구 취사를 주견으로 하는 것이지 참 수행이 아니다. 견성은 수행의 출발점이며 기본이다. 육근을 작용할 때마다 온전한(자성으로 돌아가) 생각으로 취사하는 것이 수행이며 작업취사다.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리는 실행공부는 행복과 마음의 자유를 얻는 길이다. 일심을 떠나지 않고 죽기로써 하고 하고 또 해서 변화된 것이라야 진짜 힘이지, 나이 들어 저절로 변한 것은 참 힘이 아니다. 죽기로써 행하여 새 길을 내야 윤회를 벗어난다. 산전수전 공중전 온갖 풍상 다 겪고 나서 힘이 생기는 것은 다음 생에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고 나서 힘이 생기는 패턴이 반복된다. 자성을 모른 채 이런저런 공부로 기질이 바뀌어도 괴로움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유전된다. 자성에 비춰 죽기로써 실행하는 작업취사 공부라야 업이 녹아 흔적도 없게 하는 참 수행이며, 극락 생활의 지름길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견성도 수양도 연구도 취사력을 기르지 않을 거면 대체 어디에 쓴단 말인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6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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