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허선재 교무] 일요일 오전 10시. 어른들의 법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어린이들의 법회도 함께 시작된다. 아직 자기 이름도 쓸 줄 모르는 5살 유아부터 사춘기를 맞이한 13살 초등학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 저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교무님! 어제 저 이거 했어요!”, “교무님! 오늘은 법회 뭐해요?”, “교무님…!”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주다 보면, 어느새 법회 시간 직전이다. 자리에 앉히려고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옆구리에 끼우기도 하고, 그렇게 한 명씩 잡아 오다 보면 슬그머니 한 명씩 또 자리에서 벗어난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엉망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내 생각대로 해주지 않는 게 커다란 경계로 다가왔다. ‘가만히 잘 앉아있으면 좋겠는데, 말 잘 듣고, 법회에 적극적이면 좋겠는데…’하는 바람과 ‘질서와 안정, 규칙과 통제,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하게, 보기 좋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욕심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사실은 알고 있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자신이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인 것을. 단지 지금 이 시간에 내가 하고자 하는 바람과 아이들의 바람이 달라 서로 어긋날 뿐이다. 
 

아이들의 마음이 자라난다.
내 마음도 자라난다. 
서투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맞추어 간다

‘이 틈을 어떻게 좁혀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모두가 만족하고 즐거운 법회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에너지의 방향을 마음공부로 돌릴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생각의 실타래가 꼬였다 풀렸다 하기를 여러 차례였다.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잠시 방법적인 궁리는 내려놓고 내 마음을 바라보았다. 잘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꽉 차 있구나. 그렇구나. 너무 힘들어 보이네. 쉬운 일부터 차근차근하자, 차근차근.

내 마음을 읽어주고 수용하고 나니, 아이들의 마음도 조금씩 수용되기 시작한다. 

법회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아이에게는 “그래 그럴 수 있어. 그래도 조금만 더 같이 해보자”하고, 법회보다 다른 것에 흠뻑 빠진 아이에게는 “지금 너는 이걸 더 하고 싶구나? 그럼 딱 5분만 더 하고 법회 보자?”하고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아이들 스스로 돌릴 수 있도록, 스스로 약속을 지키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비록 지금 당장은 어수선한 모습이어도, 다른 사람의 말에 따르는 것이 아닌 스스로 지키는 어린이가 되도록 함께 자리를 지켜준다. 그렇게 1년이 흘러 아이들은 성장한다. 일반법회가 끝나고, 아이들을 데리러 오는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에게 인사를 할 때 내게 “우리 ○○이가 교당 언제 가냐고 매일 물어봐요”, “우리 ○○이가 교당 나가면서 많이 안정됐어요”라는 말들을 전해주신다. 

마음에 보람과 기쁨이 흠뻑 차오른다. 아이들의 마음이 자라난다. 내 마음도 자라난다. 서투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발맞추어 간다. 순수의 마음으로, 함께 나아간다.

/북일교당

[2023년 6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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