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교당 오정신 교도
프랑크푸르트교당 오정신 교도

[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독일에 와서 40년을 찾아 헤맸다. 다시 교당을 만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어릴 때부터 할머니를 따라 이리교당을 다녔던 오정신 교도. 이리교당 학생회를 졸업하고 다시 원불교를 만나기까지 40년이 걸렸다고 했다.

스물다섯 살 때 독일에 와 30여 년간 성당을 다녔다. ‘내 종교는 원불교’라는 말은 못 한 채, 성당에 가면 마음속으로 ‘사은님, 법신불 사은님’을 부르며 기도하고 미사 자리를 채웠다. 가족 된 이들의 종교가 천주교이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국에 들어올 때면 교무들에게 “독일에 있는 교당을 좀 알려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왜인지 주소 하나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타국에서 교당을 다시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다 6개월 정도 긴 여행을 다녀온 후, 정말 우연히 쌓여있던 교포 신문에서 ‘원불교 연등 신청받는다’는 내용의 광고를 보게 됐다. 눈이 번쩍 뜨였다. 차로 두 시간 반 거리쯤은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교당으로 곧장 달려갔다. 그렇게 교당을 다시 만난 게 원기92년(2007)이니, 이리교당 학생회를 졸업한 때로부터 꼭 40년 만이었다.

한 번의 헤어짐을 겪고 새롭게 인연 된 남편은 <원불교교전>을 읽어보고 매우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공부하면 나도 붓다(부처)가 될 수 있다’는 ‘자력신앙’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교포 신문에서 광고를 본 오 교도가 “교당에 당장 가야겠다”고 하니 “혼자만 보낼 수 없다. 나도 같이 앉아있고 싶다”며 함께 교당으로 향했다. 의학박사인 남편은 본래 신학을 공부했는데, 맹목적으로 바라고 원하는 기도가 항상 마음에 걸리던 사람이었다.

오 교도는 원불교를 다시 만난 것에 더해 남편과 함께 교당을 다닐 수 있음이 기뻤던 듯 했다. 당시의 마음을 ‘복이 있어서 이렇게 원불교를 다시 만나게 됐구나. 힘듦을 겪고 있을 때 만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행복하다’고 표현하는 말에서도 그 기쁨이 드러났다.

“(원불교를) 항상 찾아 헤맸어요. ‘해주세요’ 말고, ‘나 자신이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따라, 하루하루 감사생활을 했고, 주어진 환경들이 나를 공부하게 만들어 줬죠. 이제 나는 어떻게든지 교당을 지켜줄 수 있어요. 한인이 많은 지역에서 교당 교화가 활발해지도록,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 줘야죠.” 그에게 또 하나 바람이 있다면, 초창기 고생한 한인들을 위한 노인정이나 양로원이 생겨 공도자숭배 정신이 실현되는 역할을 원불교가 하는 것이다.

[2023년 6월 21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