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웅산으로 온 지도 10년이 넘었다. 오래 살던 상주 시내를 떠나 호젓한 이곳에 든 건 숫제 꿀벌 때문이다. 벌들에게 좋은 환경을 찾다 보니 2차선 도로 빈 땅에 집까지 지었다. 사람 사는 공간보다 벌과 닭과 공작과 개의 집이 더 큰 겸손한 집, 벌 덕분에 웃고 벌 때문에 울며 벌 따라 꿀도 따는 매일, 대한민국 양봉 분야서 손꼽히는 차용호 박사(법명 성호, 상주교당 교도회장, 한국양봉협회 상주시지부장)이다.

그 많은 꿀벌은 어디로 갔을까. 2017년부터 UN이 5월 20일을 꿀벌의 날로 지정하고 지키고자 아등바등하지만, 꿀벌은 계속 사라지고 있다. 지난해에만 대한민국에서 폐사한 꿀벌은 39만 봉군(78억 마리), 이는 전체 사육 꿀벌의 16%에 이른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이내 멸망한다는데, UN은 ‘이대로라면 2035년에는 꿀벌이 멸종된다’고 경고했다. 그럼, 인류의 멸망까지는 겨우 16년 남은 셈이다.

농약에 닿고도 집까지 날아와 죽는 벌
“벌이 사라지는 가장 큰 이유는 농약입니다. 갈수기에 벌들이 논물을 먹는데 그 물에 이미 농약이 많아요. 드론으로 농약을 뿌리니 공중에서도 죽고요. 열매를 크게 맺기 위해서는 꽃을 솎아내야 하는데, 사람이 없으니 약을 쳐서 꽃을 떨어뜨립니다. 이때 벌들이 몰살당하죠.”

어디선가 농약에 닿고 돌아온 그의 벌들이 벌장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성치 않은 몸으로 집까지 날아와 죽는 벌들. 그 앞에 매일 마음을 추스른 지도 오래됐다.
“법에서 정한 대로, 농약 치기 전 신고만 해줘도 이렇게 떼죽음을 당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양봉 업계가 힘이 없으니 아무리 말해도 허공에 메아리죠.”

안전한 꿀샘나무(밀원)이 날로 적어지다 보니, 농약을 피한대도 벌들은 늘 영양실조다. 설탕이나 화분떡 등 인공사료를 주긴 하지만, 꽃의 꿀을 빨지 못하니 건강할 리 만무하다. 실제로 1998년 낭충봉아부패병이 창궐했을 때, 약하디약해진 토종벌들이 속수무책으로 전멸한 이유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그는 꿀샘나무 심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벌하는 사람일수록 내 벌 먹일 생각만 하지 말고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데 자력생활과 지은보은이 다 들어있다. 경북대 퇴임 후 평생교육원, 기술센터 등에서 강의도 하고, 연구도 하는 만큼 그는 나무 심기에 정성을 쏟는다. 벌꿀 생산단지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상주시도 퍽 진심이어서, 수년째 꿀샘나무 군집을 3만 평씩 넓혀왔다. 그는 최근 양봉산업진흥법 방향에 따끔한 일침도 가한다. “사료인 설탕을 주기보다, 나무 심는 사람이나 단체에 혜택을 줘야 한다”는 것. 
 

대한민국 손꼽히는 꿀벌전문가, 퇴직 후에도 강의·연구
아인슈타인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 이내 멸망한다’
주로 농약 때문에 사라져, 꿀샘나무 많이 심어야
“양봉, 쉽고 수익성 높으며 공익적인 실버사업”

올해 벌통 하나, 내년에 꿀 한 말
“양봉은 귀농 귀촌해서 비교적 손쉽게 할 수 있는 수익사업입니다. 시골집에서 노인 혼자도 할 수 있는 실버산업이기도 하죠. 올해 20만 원 들여 벌통 하나를 놓으면, 내년에는 꿀 한 말 떠서 번 50만 원으로 손주들 용돈 준다고들 했어요. 인공봉분 시키면 벌통도 확 늘어나니 점점 수익이 많아지죠. 특히 꿀은 보존기간이 길어 값이 잘 안떨어지는 데다, 우리 토종꿀 위상이 높아지고 있어서 전망이 좋습니다.”

코로나19때 꿀이 ‘천혜의 건강식’으로 뜬 후, 언젠가부터 대기업이 꿀을 드럼째 수매해간다. 예전에는 꿀을 2.4kg 유리병에 담았으나, 이제는 500g으로 예쁜 병이나 아예 한 포씩 먹도록 벌꿀스틱으로 많이 팔리는 상황.

“호주의 마누카꿀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밤꿀의 항산화 효과가 더 큽니다. 우리는 수입산을 찾지만, 사실 한국 꿀은 세계적으로도 대단한 수준이에요. 비싼 편인데도 탁월한 성분이나 월등한 향 때문에 많이 찾지요.”

도심 건물 옥상에도 벌통을 놓는 도심 양봉의 시대, 그는 전국 곳곳의 교당이나 훈련원, 기관에서의 양봉도 권할 만하다 짚는다. 수익도 수익이지만,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고 생태계를 지켜내는 공익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도회장 맡으니 다시 일벌 된 기분
“뭘 키우는 일을 애초에 좋아했나 봐요. 어릴 때 방학이면 시골집에 갔는데, 돌아올 때면 병아리며 강아지를 안고 왔더래요. 그래서인지 인문계는 시험도 안 보고 상주 농고에 들어갔죠.”

이후의 이력은 다채롭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로 대회도 나가고, 경주 축협 공무원이기도 했으며, 결국 상주 농고로 돌아와 교편을 잡았다. 그때 처음 벌을 만나 1년쯤 하니 학교에서 양봉 과목을 배정했고, 전문성을 갖추려 대학에 진학해 ‘꿀벌박사’가 된 것이다.

다만 그의 교당 생활은 발령 따라 직업 따라 바람처럼 오갔댔다. 그의 연원은 상주교당 두 번째 교도인 어머니(故 손윤정 교도)로, 당시 두 여동생은 아버지에게 “엄마가 이상한 데 가는거 같다”고 일러바쳤었다. 그만큼 낯설었던 원불교에, 가족과 함께 그도 서서히 젖어 들었다.

결정적 순간은 어머니의 천도재였다. 49재를 마치고 나자 윤정암 교무는 그에게 말했다.

“올해 제 서원이 차 교도님 교당 출석하게 하는 겁니다.”
“…아 그래예? 그라모 그랍시더.”

그 길로 꼬박 3년을 무결석 하며 몸과 마음 다 붙박은 차용호 교도. 그의 신앙만큼이나 또 잘 자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아들 차명제 교무(임실교당)다. 아버지 닮아 촉망받는 태권도 인재였지만, 그와 아내(최원경 교도)의 간절한 기도로 출가의 길에 들었다.

“교도회장을 맡아, 다시 일벌이 된 듯 바쁜 마음입니다. 좋은 꽃나무가 건강한 꿀벌과 좋은 꿀을 낳듯, 이 좋은 우리 법으로 교화도 풍년 이뤄야죠.”

[2023년 6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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