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밖은 위험하다. 

너무 넓은 세계는 간혹 방향을 잃게 한다. 조심조심 하지 않으면 자칫 길을 잃어 헤매게 된다. 그래서 부단한 교육과 기억을 필요로 한다. 스트레스다. 종이 전혀 다른 생명체와 경쟁하는 일도 만만하지 않다. 간혹 생명을 위협하는 천적을 만나게 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늘 긴장의 연속이다. 같은 종끼리도 영역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패배자가 되어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친다.
우물 안은 안전하다.

해가 뜨고 해가 져도 길 잃을 일이 없고 목소리를 높여도 나무랄 이가 없다. 서로 사정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끼리끼리 손발을 맞추고, 적당히 타협만 잘 하면 무난해지기에 서두를 일도 없다. 그래서 안일해진다. 굳이 알려고 하거나 알 필요도 없다. 그게 그것이기에 서로 좋은 말만 하면 무난해진다. 간혹 목청 큰 놈이 있긴 해도 눈 한번 질끈 감으면 이도 지나간다. 외면이 답이 된다. 무엇보다 외부의 침입이 없으니 굳이 긴장할 일이 없다. 좁은 우물 안에서 영역 싸움은 무의미하다. 도전이 허락되지 않는다. 욕심만 조금 줄이면 그리 큰 걱정이 없다. 

간혹 우물 안이 답답해 탈출을 시도하는 개구리가 있다. 하지만 바깥 세계에 놀라 이내 우물 속으로 다시 뛰어든다. 그 무용담 끝에는, 항상 여기가 낙원이고 제일 안전하다는 결론이다. 지혜 있는 이가 한 마디 거든다. ‘깨침을 얻어 세상을 통찰하면 우물 안에 있으나 우물 바깥에 있으나 한결 같고 여유로워. 우물 안팎이 둘이 아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을 잠시 나섰다고 해서 세상을 다 안 것이 아님에도 가끔은 이게 먹히는 일이 있다. 

이처럼 착각이 가끔은 지혜로 둔갑하는 일이 왕왕 우물 안에서는 벌어진다. 그래서 ‘우물 안이 답답하면 우물 밖은 위험하다’는 이중 논리가 손발을 묶기도 한다. ‘우물 안이 안전하다면 우물 밖은 기회이다’라는 소수 논리가 묵살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관점에서 소태산의 행보는 참 특이하다. 고향인 영광에서 깨달음을 얻었으나, 부안 변산에 숨어들었고, 다시 익산으로 발길을 돌려 기지를 마련했음에도, 그 번잡한 한양을 수시로 드나들며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았다. 깨달음만 얻으면 수만 대중들이 우물 속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듯, 직접 인연들을 찾아 우물 밖으로 나서는 희귀한 성인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새 시대의 새 성자란 별호와 함께 ‘불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의 시대정신을 담은 기치는 설득력을 가진다. 

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마르는 물속에서 올챙이들이 꼬리를 흔들며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소태산이 걱정했듯, 그런 긴장과 위기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애써 파놓은 우물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2023년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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