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호 교무
박윤호 교무

[원불교신문=박윤호 교무] 어린 시절의 피카소 그림을 보면 몹시 정교하여 오랜 세월 예술계를 주도해온 사실주의 화풍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천재적 소양을 가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그는 그 시절 자신의 그림을 부끄러워했다는 후문이다. 자신만의 특유한 예술적 가치를 담아내지 못한 ‘모방’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그가 추구했던 예술적 정점을 담아낸 작품을 보면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를 연상시키는 난해함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당대에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과 함께 심지어 일찌감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했던 그의 아버지와 갈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평단과 수집가들 모두에게 인정받는 대화가가 되고 만다.

노자의 <도덕경>에서 말하는 대교약졸은 대직약굴(大直若屈: 크게 바른 것은 마치 굽은 듯 하다),  대변약눌(大辯若訥: 가장 큰 웅변은 어눌한 말투로 들린다)와 라임(Rhyme)을 이루며 항상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외치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지혜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궁극의 가치는 찬란하고 웅장하게 빛나는 것이 아니라 조촐하고 꾸밈없음에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근대화 산업화 시기, 그리고 권위주의 시대를 지나오며 우리는 교단이 겪었던 세(勢) 가난으로 인해 불가불 나타난 실력을 드러내 보이는 데 노력을 경주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이다. 새 시대의 종교는 음계인증만 가지고는 안되고 양계인증도 아울러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세월 이른바 방편교화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방편은 정법(正法)이 중심에 바로 설 때만 그 효과와 유익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정법이란 다름 아닌 내면의 실력(實力)이다. 대산종사는 도인의 세 가지 꺼리는 바 가운데 두 번째로 실력이 없이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꼽았다. 예로부터 실력이 있되 드러나지 않음은 오히려 갖춰야 할 품성으로 비유됐다. 태공망의 곧은 낚시 비유가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참된 실력은 오히려 
감추어진 듯한 데서 
그 묘미가 드러나.
세(勢) 드러내기 급급한 
과거종교 폐습 닮아선 안돼.

흑묘백묘론으로 개혁개방에 앞장서 현재 중국이 G2 반열에 드는 기반을 다진 덩샤오핑은 1997년 죽음에 이르면서 향후 50년간 미국에 맞서지 말고 도광양회(韜光養晦)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힘을 키우기 전까진 패권을 추구하지 말라는 경고다. 도가에서는 도광산채(韜光鏟彩: 빛을 문지르고 무늬를 대패로 깎아 숨긴다)라는 말로 더 잘 알려진 교훈이다. 그러나 21세기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전랑외교로 굴곡져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새해 아침에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며 우리 회상이 장차 다른 세력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크게 주의하라 했고, 상불경(常不輕)의 정신을 놓지 말라 경계했다. 불경스런 생각이겠으나 오히려 기가 막히는 듯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업신여기기는 되려 업신여김 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동시에 부끄러운 자화상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다른 종교의 거대한 건물과 하늘을 찌를 듯한 첨탑을 바라보며 우린 언제 저렇게 해보나 부러워하지는 않았나, 그들의 회당을 가득 메운 대중을 보며 작디작은 스스로를 자조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못자리판의 비유는 장차 심히 창대하리라는 결론에 무게를 실을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이 미약하리라는 데 방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종자원은 쌀을 생산해서 국민을 먹이는 곳이 아니다. 저 들에 나가 만대중을 먹일 종자를 기르는 곳이다. 더 이상 규모의 함정에 드는 일이 없이 종갓집 씨간장과 같은 교단의 가풍을 기대해본다. 정산종사의 반월(半月)과 반개화(半開花)를 더 사랑하는 가풍이 그것이다. 바른 말은 아름답지 않고(信言不美), 아름다운 말은 미덥지 못한 법이다(美言不信).

/김화교당

[2023년 6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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