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오늘도 교당에서 앞치마를 벗고 온 참이었다. 다음날 재가교역자훈련과 일요법회, 화요선방까지 교당에서 공양할 몇백 인분의 식사 재료 준비를 도왔다. “오늘도 봉공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는 박용신 강남교당 봉공여성분과장. 그는 낮은 자리 진 자리에 가장 먼저 달려가 상 없고 말 없는 봉공을 펼쳐왔다. 

“봉공이라는 게, 처음에는 남에게 베푼다며 시작하죠. 그런데 어느샌가 자신을 위한 일인 걸 알게 돼요. 공부가 다 이 현장에서 이뤄지고, 우리 교법과 마음공부가 다 봉공 속에 있습니다.”

진정한 봉공은 공부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교당과 교구, 복지관, 보육원, 양로원 등 모든 현장에서 이를 깨달았다. 땀방울과 눈물로 직접 배운 진리였다.

성나자로마을의 거룩한 순간
“여름에는 한국보육원에서 풀 뽑고, 수락산시립노인양로원에서 천도재 모시고, 유린원광종합장애인복지관에서 목욕 봉사하는 계절이에요. 철마다 장소마다 원불교 봉공은 은혜 꽃을 피웠죠. 상 없고 말 없는 원불교 봉공인들에게 늘 배웠습니다.”

그가 두고두고 떠올리는 순간은 성나자로마을에 처음 갔을 때다. 원기90년(2005), 강남교당이 한센병 환우들의 공동생일잔치를 챙긴 지 30년 되던 해였다. 

“그곳엔 오랜 투병으로 얼굴이 일그러지거나 손 마디마디가 휘어져 모양이 변해버린 분들이 있어요. 저는 두려운 마음에 멀찌감치 있었는데, 박청수 교무님은 오랜만에 만난 형제인 듯 그들에게 스스럼이 없었어요. 그들의 손을 덥석 잡고 한 몸인 듯 어울려 춤을 추셨죠.”

일호의 사심도 없는 지극한 무아의 봉공. 그 거룩함에 마음이 녹고 경계가 무너졌다. 이후 꼬박꼬박 성나자로마을을 찾아가기 시작한 게 올해로 18년, 그는 이제 22명으로 줄어든 한센인들을 가족으로 대하며 원불교의 동포은과 삼동윤리를 실천하고 있다.

강남교당의 봉공은 제 울을 넘어 이웃과도 함께 했다. 스승이 ‘지역사회에 나가 봉공하자’고 한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아 당장 교당 옆 복지관을 찾았다. 그와 교도들이 ‘원불교 봉사팀’으로 활동하는 동안, 원불교와 강남교당은 지역에 따뜻하게 뿌리내렸다. 그에게는, 입양 가기 전의 미혼모 아기들을 품에 안고 눈물깨나 흘렸던 시절이기도 했다.
 

“우리 교법, 마음공부가 다 봉공 속에 있습니다”
성나자로마을, 찾은 지 18년… 한센인들도 가족
든든한 도반인 남편과 세 딸이 ‘함께’ 기도하는 삶  

그를 쳐다보다 “얼굴 좋다”던 스승님
“이 법 따라, 스승님들 말씀 좇아 사는 게 공부고 보람이죠. 고등학교 때 답십리교당(현 전농교당)에 처음 간 순간부터 원불교도 교무님들도 너무 좋았어요. 제가 입교시킨 친구의 오빠와 결혼하며 이정택 교무님(열반)의 1호 주례 부부가 됐죠. 그때 ‘힘들 때마다 내 뒤에 사은님의 든든한 빽이 있다고 생각하라’는 말씀이 힘이 됐어요.”

가끔 뵐 때면, 이정택 대봉도는 그를 빤히 쳐다보다 “얼굴 좋다”고 했다. 그러면 그는 ‘아, 그동안 내가 잘 살았구나’라고 생각했다. 스승의 한마디를 성적표로 삼아온 인생이었다.

“결혼하고 뜸하다가 막내가 100일이 되자마자 등에 업고 강남교당 화요법회에 나갔어요. 처음처럼 다시 너무 좋았습니다. 박청수 교무님의 설법이 꼭 저를 위한 것 같아서, 마음이 다 절절하고 눈물도 났어요.”

서서히 남편(김영석 교도)도 컴백하며, 부부와 다섯 식구는 강남교당의 보물이 됐다. 특히 교무와 교도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세 딸은 그 기도만큼 대견하게 커줬다. 서울대학교 원불교 교우회(서원회) 회장을 맡아 서원회 30주년 행사를 치러냈던 첫째 소영(본명 주현)은 지난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임용됐고, 둘째 원화와 셋째 주은은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세 자매가 오롯하게 제 길을 가니 부모는 이제 ‘아이들이 제 자리에서 공심으로 살며, 세상을 이롭게 해주기를’ 기도한다.
 

“당신… 혹시 교당에서 기도했어?”
박청수 원로교무가 교당을 이끌 시절 간사를 맡았고, 현재 강남교당 신입교도훈련을 이끌고 있는 남편 김영석 교도. 박 교도는 남편 이야기를 하겠다며 ‘기가 막힌’ 기도 얘기를 꺼낸다. 

“애들이 어릴 때, 동아건설을 다니던 남편이 월급이 적어지고, 어느 때는 못 가져오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고 기다렸는데 발표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더라고요.”

누구나 당연히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터, 하지만 박 교도의 생각은 달랐다.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장 교당을 찾아갔고,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교무님과 기도를 시작했다. 며칠 만에 꿈을 꿨는데, 너른 땅에 예쁜 꽃 한 송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그 회사에서 오라고 전화 왔어! 근데 당신… 혹시 교당에서 기도했어?”

이렇게 촉이 좋은 남편이라니. 벅찬 마음에 그날 저녁 심고를 모시려던 차, 9시 뉴스 첫 헤드라인에 한 번 더 놀랐다. 동아건설의 부도가 최종 결정됐다는 내용이었다. 그 놀라운 하루 이후, 그는 기회만 되면 100일 기도를 결제해 끝까지 지켜내고 있다.

낮은 자리 진 자리 가리지 않고, 상 없고 말없이 해낸 그의 역사 어느 한 페이지도 무아봉공 아닌 것이 없다. “공부하면 할수록 봉공할 일이 많고, 봉공하면 할수록 공부할 것이 많다”며 매 순간 균형을 지키는 삶. 명징하고도 다사로운 그의 하루하루에, 공부인이자 봉공인의 깊이가 더해져 간다.

[2023년 7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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