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나는 왜 복이 없을까? 나는 왜 삶이 힘들까? 나는 왜 지혜가 부족할까? 그런 생각이 든다면 오랜 생을 통해 부처를 제대로 몰라보고 부처로 대하지 않고 살아왔음을 자각할 일이다. 삶이 평안하고 복과 지혜가 충만하려면 부처가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해 그 부처가 어떤 작용을 하든 부처로 대하면 된다. 

그러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이쯤 되면 곧바로 답이 툭 튀어나올 법하다. 부처 아닌 것이 없지! 그렇다. 나를 비롯해 일체 만물, 보이지 않는 허공법계 모두가 위대한 자, 부처다. 부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은, 일체가 내게 죄복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부처님 대하듯 하라는 뜻이다. 일체를 부처님 대하듯 하는 이는 천지만물이 또한 그를 위해 줄 것이므로 복이 넘치고 앞길이 밝게 열리며, 진리의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된다. 

일체만물 허공법계가 부처이지만, 그 부처는 정지된 마네킹 상태가 아니다. 물론 알기 쉽게 표현하느라 가져다 쓴 비유일 뿐, 무정물인 마네킹조차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고 생주이멸하며 움직인다. 일체만물의 움직임은 모든 순간 부처가 하는 것이다. 일체만물 허공법계의 모든 작용이 부처의 작용 아닌 순간이 없다. 춘하추동 생로병사 성주괴공,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일체의 작용은 부처의 작용이며 묘유며 기적이다. 

이런 생각이든 저런 생각이든, 이런 행이든 저런 행이든 다 부처가 하는 것이지 중생은 따로 없다. 깨달은 이만 부처고 나머지는 부처가 아니라거나, 훌륭한 언행만 부처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처의 작용이 아니라고 여긴다면 깨달음을 얻지 못했거나, 그 자리를 놓친 상태다. 깨달은 자리에서 보면 일체가 부처 아님이 없고 한순간도 부처의 작용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닌 때가 없다. 일체가 부처이니 매 순간 일체만물의 작용 또한 부처의 작용이다.
 

분별 집착만 놓으면
나도 상대방도 온 세상도
지금 그대로 온전한
부처의 몸짓.

일체를 억지로 부처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하면 이미 부처인데 애써 부처로 보려고 노력하면서 그것을 마음공부라고 착각한다. 곧바로 본원자리로 돌아가면 일체가 부처, 법신불 아님이 없다. 

어떤 존재든 있는 그대로 다 부처며, 모든 순간 일체 존재의 작용이 있는 그대로 온전한 부처의 작용임을 정확히 알아 믿는 것이 참 신앙이다. 일체의 작용은 훤히 보고 아는 텅 빈 자, 공적하면서 영지한 법신불이 한다. 

단절 없이 통으로 있는 한몸 법신불이 곧 나다. 단절된 나로 홱 돌아가 에고의 차원에서 옳고 그르다고 분별망상을 일으킬 때만 괴로움이 발생한다. 본성에서는 더 훌륭한 존재도, 더 훌륭한 작용도 없다. 이 육근작용 또한 법신불, 부처의 작용 아닌 때가 없으니 법신불을 떠나지 않고 걸림 없이 육근을 잘 부려 쓰는 것이 온전하고 괴로움 없는 삶이다. 

그 자리에 머물면 나 하나뿐이라 괴로움을 줄 대상이 따로 없으니 늘 극락이다. 분별하는 마음이 괴로움을 만들 뿐 세상은 아무 문제없는 부처의 나타남이며 부처의 작용이다. 분별 집착만 놓으면 나도 상대방도 온 세상도 지금 그대로 온전한 부처의 몸짓이다. 

부처 아닌 것이 없고 부처 아닌 때도 없다! 부처가 어디 있는가 물으면 즉시 자신을 가리켜도, 보이는 아무 것이나 허공을 지시해도 다 맞다. 손을 들어 보이든 웃어 보이든 걸어가든 그냥 가만히 있든 또한 다 부처의 작용을 보여준 것이다. 처처불상이니 사사불공하라. 사방천지 온통 부처가 움직이고 있거늘 애써 불공드리러 영험하다는 산천을 찾아다닐 일인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7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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