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오 교무
전명오 교무

[원불교신문=전명오 교무] 스페인에 가면 사람과 황소가 싸우는데, 경기장 한쪽 ‘케렌시아’에 가면 투우사는 공격을 멈추고 소도 재충전과 안식의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궁금해집니다. 내가 지치고 쉬고 싶을 때, 다시금 힘을 얻고 싶을 때, 나만의 안식처, 나만의 보금자리에서 힘을 보충하고 다시금 부처님 법바다를 힘차게 누빌 수 있는 나만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이면 좋을까?

첫째, ‘허공’이 되면 좋겠습니다. 정산종사께서는 “그대들은 허공이 되라. 허공은 비었으므로 일체 만물을 소유하나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형상 있는 것들에 분별하고, 집착하고, 흔들리고, 고통받고, 울고, 웃고, 합니다만, 모든 시비선악, 분별, 집착을 초월한 저 허공 자리에 나만의 안식처 하나를 만들고 쉬면 얼마나 좋을까요? ‘허공은 비었으므로 일체 만물을 소유한다’고 하셨으니 일체 만물이 나 아님이 없음을 알면 어떨까요? 일체가 나임을 알면, 일체의 시비 분별을 내려놓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좀 더 성리 공부에 정성을 들이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원상서원문을 외우고 “언어도단의 입정처이요”를 말하지만, 그 입정처의 자리에 들어 본 사람이 있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바”라고 할 때, 그 생사문 자리를 맛본 사람이 있고, “그 문이 도대체 어떤 문인가요? 안방 문을 말하는 건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산 김남천 선진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어느 날 아침 비틀거리며 지팡이를 짚고 겨우 조실 앞에 와서는 소태산 대종사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당시 향산 안이정 종사께서 소태산 대종사님을 시봉하는 시자였는데 “이른 아침에 어찌 이렇게 오셨소?” 하니 남천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대종사 종사주 어르신을 모시고 살아 온 지가 벌써 20여 년이 넘었는데 아직 견성인가를 못 받았어요. 이제 내가 이 세상에 살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대종사님께 견성인가나 받고 가려고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했고,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만법귀일의 소식을 일러라!”하고 화두를 던지셨다고 합니다. 이에 남천 선생이 “청정법신불 아닙니까”라고 대답하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알았으니 돌아가라고 하셨고, 남천 선생은 집으로 돌아가신 뒤 며칠 후 열반에 드셨다 합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남천 선생이 열반에 든 후 말씀하셨습니다. “그와 같은 신심과 원력이 있으니 다음 생에는 쉽게 견성을 할 것이다.” 또 대중에게 “일생에 견성은 서둘러서 해야 할 것이며 꾸어서라도 해야 한다!” 하셨다는 내용이 향산종사님 문집에 나옵니다. 모든 분별 주착이 없는 저 허공 자리 한켠에 나의 마음 쉴 곳을 마련해 두면 어떨까를 말씀드려봅니다. 

‘다음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저 법신불 일원상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한 제자가 여쭙습니다. “극락과 지옥이 어느 곳에 있나이까.”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네 마음이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죄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지옥이니라”고 하십니다. 우리 원불교의 교리를 쉽게 이해하자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을 열고, 일원상 진리를 확인하는 것이요, 진공묘유의 수행문을 열고 일원상 진리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리도를 보면 인과보응의 신앙문은 ‘진리를 나의 삶으로 구현’한 것이 신앙문이요, 그 모습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으로 귀결이 되며, 진공묘유의 수행문은 ‘나의 삶을 진리로 구현’한 것이 곧 진공묘유의 수행문이요, 그 결론은 무시선 무처선으로 귀결됩니다. 돌고 도는 이치 속에서, 모든 교리가 일원상에서 나와서 다시 일원상으로 들어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교리도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열반 5개월 전 발표를 하며 “참 좋다! 좋다!” 하셨답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세요.

교리도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법문입니다. 적어도 일원상 문하, 대종사님 문하의 우리 모두는 저 법신불 일원상을 나만의 안식처요, 나만의 보금자리로 삼아야 합니다. 이 세상 많은 경계 속에 때로는 지치고 쓰러지고,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그 어떤 사람과 그 어떤 일로 인해 요란함 속에 잠 못 이룰 때, ‘세상이 왜 이래, 테스형!’을 부르며 억울하고, 괴로움에 휩싸일 때, 그럴 때 나만의 든든한 안식처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 품과 같은 안식처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를 괴롭게 하지 못하는 그곳, 그곳이 어디일까요? 바로 법신불 일원상의 그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멈추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하고, 돌려 보기도 하고, 세워 보기도 해서, 다시금 힘을 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법신불님의 보금자리 안식처에서 우리는 힘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의 케렌시아는 어떠하면 좋을까요? ‘불이문’의 자리에 하나 만들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대산종사께서 만덕산 초선에서 소태산 대종사님과 함께 공부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머니가 찾아와 “오늘 설법을 들었는데 잘 모르겠다”며 젊은 청년 대산종사에게 묻습니다.

‘1.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2. 음양이 없는 땅 한 조각, 3. 메아리 없는 골짜기.’ 이 법문을 받들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알려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산종사께서는 성리는 스스로 해결해서 알아야 하므로 알려 드리지 않았는데, 훗날 그것이 일생 마음에 남으셨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 법문을 받들며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보았더니 대산종사의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당대에 수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깨우쳐 줬지만, 결국 아버지 정반왕은 깨닫게 해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성리(性理) 자리는 ‘스스로 해결해서 알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김치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김치의 깊은 맛을 알게 할 수 없고, 세상의 모든 ‘언어와 명상’은 그 시대의 공통된 약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언어를 넘어선 자리, 형상을 넘어선 그 자리를 바라보았을 때 ‘염화미소의 한 소식, 두렷한 기틀의 한 소식!’ 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글을 보는 여러분도 스스로 해결하시어 반드시 인생에 가장 축복된 하루를 만나며 영원한 케렌시아를 만나길 간절히 염원합니다. 저도 노력해 보겠습니다. ‘허공 자리! 일원상 자리! 불이문의 자리!’에서 각자의 케렌시아를 만나 영원한 자유를 맛보길 다시 한번 염원합니다.

/정토회교당

[2023년 7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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