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진리는 수완 좋은 장사꾼이 아니다. 덤도 에누리도 없다. 인과는 얄짤없다. 적당히 봐주는 법도, 더 주거나 덜 주는 일도 없이 정확히 작용한 대로만 드러내 준다. 인과는 협상도 구걸도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울며 애원해도, 받는 이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고려하지 않는다. 인과는 뇌물도 통하지 않는다. 신분이나 권력이 높아도, 성자여도 봐주지 않고 무심히 지은 그대로만 돌려준다. 정확하고 공정하기에 억울할 일이 없다. 

지금 직면하는 모든 것은 진리의 계산으로 나온 결과임과 동시에 진행형이다. 거기엔 현생으로만 판단할 수 없는 숙겁에 이월된 값이 포함돼 있으며, 지금의 마음과 행동에 따라 찰나 간에 계산은 바뀌어 간다. 현재 보고 듣고 당면하는 모든 것은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다. 그것이 좋거나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겪어야 하기에 그 일이 그에게 일어난다는 뜻이다. 현실의 모습은 내 성장과 진급에 필요한 요소들이며 또한 가장 진리적이다. 지금 무엇을 마주하거나 듣거나 보거나 그 속에 함께 있다면 그것은 나와 인연이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든 그것을 겪지 않을 이는 희한하게도 피해 간다. 작용하지 않은 것, 인연이 아닌 것은 내 앞에 드러나지 않는다. 진리는 다 보고 다 알아 그대로 현실로 드러내 줄 뿐이다.

현실에 마주하는 모든 것은 일어날 조건이 갖춰지면 작용한 그대로 나타난다. 마음에 늘 떠올렸거나 좋아했거나 거부했거나 자주 행했기 때문에 내 앞에 진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알았든 몰랐든 가지고 있는 내 집착이나 거부의 에너지가 불러들인 결과물이다. 
 

분별 집착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용,
그 자리에 머물면
괴로울 일이 없다.

매 순간 진리는 더 좋고 나쁜 것을 구별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드러내 준다. 일원이 아닌 단절된 나에 머물러 좋고 나쁨을 분별하고 집착할 때에만 모든 괴로움은 온다. 통증의 크기나 성공과 실패, 물질의 증가와 감소가 반드시 괴로움과 직결되진 않는다. 이것은 좋은 일이고 저것은 나쁜 일이라고 이름 붙여, 좋은 것만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병이다. 분별과 집착만 놓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든 저런 일이 일어나든 아무 문제 없는 온전한 진리의 모습이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중립상태로 있다. 어떻게 응하느냐에 따라 극락이 되기도 하고 지옥으로 변하기도 하는 신통을 부린다. 모든 일은 그 자체로 좋은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분별과 집착 없이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용이며, 그 자리에 머물면 괴로울 일이 없다.

성자들이라고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성자들은 좋거나 나쁜 일이라고 분별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진리 작용으로 받아들여 중용에 머문다. 바람 불고 비 오면 치우고 닦으면 될 일이며, 설령 그것이 죽음이어도 생사가 둘 아님을 아는 까닭에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의 현재 정치 수준과 나랏일 하는 이들의 행태와, 국민의 정신건강과 복지, 문화 일체는 딱 구성원들의 평균치 의식 수준에 맞는 인과로 드러난 진리다. 국민들의 평균치가 딱 그만큼의 인지이기에 그와 같은 지도자를 선택하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살아간다. 함께 받는 공동 인과다. 같은 시각에 공존하는 지구촌 나라들이어도 천양지차의 삶을 살고 있다. 서로서로 위해주며 가진 것을 공평히 나누는 일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상낙원이 있는가 하면, 탐진치가 치성하여 서로 싸우고 자기 배 채우기만 바쁜 사람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들도 있다. 

지금 일어나는 일체 현상에 집착이나 거부 없이 중용으로 응하다 보면 더 이상 그런 일을만나거나 듣거나 보게 될 씨앗이 심어지지 않는다. 수 없이 씨 뿌려 놓고선 자꾸 싹이 나온다고 투덜댈 일이 아니라, 얄짤없는 진리의 부지런함과 공정함에 탄복할 법하지 않은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7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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