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금은 100% 순금이 없다. 금의 순도를 말할 때 9가 몇 개냐에 따라 99.9를 쓰리나인, 99.99를 포나인으로 부른다. 순도가 높을수록 9의 숫자가 늘어나며 최고의 금은 9가 7개인 99.99999 쎄븐나인이다. 100% 순도를 가진 금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99.9%인 쓰리나인 이상을 그냥 순금 100%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엄밀히는 100%가 아니다.

깨달음에는 금의 순도처럼 쎄븐나인도, 그 이상도 통하지 않는다. 99.9%의 깨달음이란 없다. 거의 다 온 깨달음도, 웬만큼 아는 깨달음도 없다. 9가 무량하게 99.9…%로 깨달음에 근접하게 수없이 붙어 있다 해도 100%가 아닌 이상 깨닫지 못한, 완벽한 어둠, 무명이다. 깨달음에는 깨달았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견성을 했거나 못했거나 그 둘만 존재한다. 견성이냐 무명이냐, 흑이냐 백이냐로 나눠질 뿐 그 중간지대는 어디에도 없다. 

진리는 깨달았는가 아닌가만 있지 이해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견성하지 못한 이는 다 동일한 상태의 어둠에 있으며 실낱같은 한줄기 진리의 빛도 보지 못한 상태다. 어둠은 어둠이고 밝음은 밝음이다. 깨달음에는 거의 다 밝아오는 여명 같은 상태는 없다. 깨달음은 100이거나 0이거나 둘 중 하나만 있다. 거의 다 아는 깨달음은 없고 그냥 무명일 뿐이다. 물을 마신 것이면 마신 것이지 물맛을 거의 다 안다는 것은 물맛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진리, 일원, 참나,

성품이 무엇인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쏟아져 나와야
깨달음이다.

진리를 거의 다 안다거나, 다 이해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깨닫지 못한 상태다. 진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은 지식 창고를 채우기에만 애쓸 뿐 실제로 깨닫지 못함을 인식하지도, 깨달음의 필요도 잘 느끼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성자들의 말씀의 본의를 제대로 알 수가 없다. 자기 생각과 수준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전하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지혜로운 이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일찍이 알아차려서 시절인연 따라 깨달음을 얻는다. 이들은 스스로의 무명 상태를 인식하고 깨달음의 원을 세워 신분의성을 계속한 결과 이미 깨달음의 바다에 이르렀는데, 불행하게도 머리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자기 아는 것에 만족하여 제자리만 맴돌다 간다. 머리로 이해한 진리는 성자들의 가르침에 사실상 맞지 않으며 영생문제, 괴로움의 근본 문제는 결코 해결 못하고 영생을 고통으로 윤회한다. 

어리석고 가련한 이들은 웬만큼 안다는 자기 주견에 빠져 살거나, 영생토록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는 깨달음을 유보하거나 우선순위에서 제외한다. 이것이 급선무고 중대사라고 성자들이 그리 간곡히 일렀건만 깨달을 생각은 않고 나도 다 안다고, 누가 그걸 모르냐고 허세를 부린다.

진리를 깨닫는 데 있어 ‘이만큼이면 괜찮은’ 정도는 없다. 눈앞 온 허공이 곧 일원이며 나다. 지금 눈앞에 곧바로 성품의 진체가 훤히 보이는가. 그렇지 않다면 다 똑같이 어둠상태, 깨닫지 못한 상태에 있다. 그러니 참된 공부인은 원을 거듭 굳게 세우고 살아있는 화두를 신분의성으로 깊이 단련하여 반드시 성품의 맛을 확실히 봐야 한다. 진리, 일원, 참나, 성품이 무엇인지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 쏟아져 나와야 깨달음이다. 

깨달음에 거의 다 온 중간지대는 없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안주하거나 다독일 틈이 없다. 죽음이 당장 오늘일지도 모르는데 머리로 아는 데에 속지 말고 실상을 볼 일이다. 99.9%는 깨달음이 아니다. 이 칠흑 같은 어둠 상태로 지금 당장 떠나도 정말 괜찮겠는가?

/변산원광선원

[2023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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