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때마침 긴-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계획된 이동을 취소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게다가 비 오는 날 기차를 타면 왜인지 모를 낭만이 더해지니, 굳이 미룰 일도 아니다.

그렇게 오른 길. 오늘 탄 기차의 종착역은 ‘서울역’이다. 오늘 향할 목적지도 ‘서울역’이다. 이날 서울로 향할수록 세차게 내리던 빗방울 수 만큼이나, 100년간 많은 사연과 사람이 오갔을 바로 그 공간이다. (본 글에서 다루는 서울역은 ‘서울역 구 역사’ 또는 ‘구 서울역’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편의상 ‘서울역’으로 통칭한다. 다만 시대에 따라 경성역을 병행해 사용한다.)
 

서울역 구 역사의 시계는 100년 중 3개월만 빼고 매일 돌아가고 있다.
서울역 구 역사의 시계는 100년 중 3개월만 빼고 매일 돌아가고 있다.

네 개의 이름, 100년의 역사
“경성시대로 안내를 시작하겠습니다.”
전영선 공간투어 해설사의 말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공간에 발을 들이니 순식간에 타임머신을 타고 100년 전 경성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기분이다. 당시의 매표소 모습도, 조명의 생김새도, 벽지와 문의 손잡이 하나하나도 모두 100년 전 경성역 그대로다. 전 해설사가 보여주는 과거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교하면 할수록 너무 똑같아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와닿는다. ‘이런 곳에 이제야 들어와 보다니!’ 오가며 수없이 봐온 덕분에 낯익은 외관과는 달리, 내부를 살펴보는 일에는 낯섦과 신기함이 가득하다.

2004년 신 역사가 생기며 기능을 종료했던 서울역은 2년여의 원형 복구 공사를 통해 2011년 ‘문화역서울284’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곳의 직전 이름이 서울역이고, 그보다 이전의 이름은 경성역, 더 과거의 이름은 남대문 정거장이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남대문 정거장의 풍경이 당시를 그대로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서울역의 전신인 남대문 정거장은 1900년 경인선의 서울 도심 구간 개통과 함께 개업했다. 이후 1922년 12월 29일에 경성역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당시 가건물 형태로 지은 2층짜리 목조 건물이었고 위치는 염천교 부근이었다(도보 7분여 거리). 그러다 1925년 현재의 자리로 경성역이 이전해 만들어졌고,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2003년까지 서울역으로 불렸다. 현재의 이름에 달린 ‘284’는 서울역의 사적번호다.
 

경성역 시절의 3등 대합실 풍경과 현재. 기둥이며 조명 모양까지 똑같다.
경성역 시절의 3등 대합실 풍경과 현재. 기둥이며 조명 모양까지 똑같다.

서울역은 ‘국제역’이었다
지금은 (거의) 국내 종착역 또는 출발역이지만, 사실 서울역은 우리나라를 엑스자(×)로 관통하는 국내 철도 교통의 중심역이자, 중국-모스크바-유럽으로 통하는 국제역 역할도 수행했다. 

“진짜로요?”라는 물음에 전 해설사가 보여준 사진 한 장. ‘서백리경유구아연락 승차선권(西伯利經由歐亞聯絡 乘車船券)’이라 적혀있다. 시베리아를 지나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기차와 배의 승차권이라는 뜻이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손기정 마라토너의 시베리아횡단철도티켓이란다. 당시 그는 동경에서 부산으로 배를 타고 이동한 후 부산에서 경성으로 기차를 타고 이동, 다시 경성에서 출발해 14일 만에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다.

이처럼 넓고 먼 세계로의 발판이 되기도 했던 경성역은 ‘고급 근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장도 됐다. 1925년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층 양옥 경성 정거장도 머지않아 손님을 맞고 보내게 된답니다.… 이 집 구조의 내용은 가보시면 아시려니와 내부에는 승강기와 난방 장치도 있고… 2층에는 이발실과 크고 작은 식당이 있다는데 200여 명분의 연회설비도 할 만 하답니다. 그 중에도 우스운 것은 중계(中階)에는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변소를 만들어 두었답니다.” 

해당 기사에 나오는 ‘200여 명분의 연회설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당인 ‘그릴’을 말한다. 이곳에서의 한 끼 식사에 드는 비용은 3원30전. 1원은 100전이고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이 60~70전이었으니 ‘쌀 네다섯 가마니’에 해당하는 큰 금액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근대 고급 문화를 경험할 수 있어 소설가 이상, 박태원 등 당시 지식인이자 모던 보이들의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이곳의 풍경은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담겨있다. ‘나는 메뉴에 적힌 몇 가지 안 되는 음식 이름을 치읽고 내리읽고 여러 번 읽었다. 그것들은 아물아물하는 것이 어딘가 내 어렸을 때 동무들 이름과 비슷한 데가 있었다.’ 

누군가 알려줘야 알 수 있는, 유심히 봐야 눈에 띄는 서울역 외부 공간 몇 곳의 이야기를 소개해본다. 서울역 정면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툭 튀어나온 곳이 있다. 이곳은 귀빈실 복도로 바로 이어지는데, 귀빈들이 차나 마차에서 내릴 때 비나 눈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거기에서 서울역 입구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중간쯤 위치한 작은 계단은 서울역 내 식당이나 이발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가던 출입구다. 1·2·3등 대합실, 부인 대합실 등이 가진 공간 곳곳의 이야기도 꽤 흥미롭다.

경성역은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꾼 후, 1960~1970년대에 수도 서울의 급격한 발전과 지방에서 서울을 잇는 가장 빠른 교통 거점으로 역할했다. 그 시절 서울역은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하는 사람들이 서울에 첫발을 내딛는 곳이었는데, 때마침(1977년) 서울역 입구 맞은편에 세워진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로 인해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는 인상을 크게 전했다고 한다.
 

구 서울역 2층 복도에서 바라본 서울역 광장. 주황색 건물이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이다.
구 서울역 2층 복도에서 바라본 서울역 광장. 주황색 건물이 대우빌딩(현 서울스퀘어)이다.

철도와 시계, 근대 문물 상징 세트
“나를 본 눈이라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제자들에게 했다는 이 말이, 서울역에서 떠올랐다. 서울역 건물 외벽에 달린 시계에 대한 설명을 듣다가다. 엉뚱한 생각의 흐름을 풀면 이렇다.

근대 문물의 상징으로 꼽히는 철도와 시계. 서울역에는 이 두 가지가 100년 역사를 함께 담고 있다. 특히 이곳의 시계는 100년째 매초, 매분, 매시를 알리는 중이다. 딱 3개월만 빼고.

그 3개월은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한 것이었다. 6.25 한국전쟁 때다. 본래 전쟁 시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곳이 교통 통로인 ‘역’ 아니던가. (전쟁의 상흔으로 입은 총탄 자국이 서울역 1층 뒤편 복도에 일부 보존돼 있다.) 서울역이 공격당할 것을 예상한 역무원들은 생각했다. ‘시계를 지켜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차역에서 ‘시간’은 생명인데다가 당시는 가정집에서조차 시계 하나를 가지기가 어렵던 시절이었다.
 

6.25 한국전쟁 시 총탄의 상흔이 구 서울역 뒤쪽 복도에 그대로 남아있다.
6.25 한국전쟁 시 총탄의 상흔이 구 서울역 뒤쪽 복도에 그대로 남아있다.

역무원들은 지름 160cm 크기의 시계를 해체한 후 부품을 나눠 갖고 피난길에 올랐다. 한 명이 모두 챙기면 유사시 되돌리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3개월 후, 역무원들이 무사히 서울로 돌아오면서 시곗바늘도 다시 돌기 시작했다. ‘한국전쟁 3개월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는 시계’다.

경성역 시절도 겪은 이 시계는 아마 보았을 것이다. 1924년(원기9) 3월 30일 첫 상경을 시작으로 100여 번에 걸쳐 서울을 오가던 소태산 대종사를.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 역시 때때로 그 시계를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 둘의 시선은, 그렇게 여러 번 마주치고 닿았을 것이다.
 

100년 역사 중 단 3개월만 빼고 매 초, 매 분, 매 시를 알리는 서울역 시계. 여전히 건재하다.
100년 역사 중 단 3개월만 빼고 매 초, 매 분, 매 시를 알리는 서울역 시계. 여전히 건재하다.

* 문화역서울284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 상시로 다양한 전시가 열린다. 전시의 종류(유료·무료)에 따라 입장 제한이 있을 수 있으며,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에서 사전신청하면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무료 내·외부관람투어를 할 수 있다.(화~일요일, 당일 신청 가능)
 

경성역 신축 당시 신성기념사진첩에 실린 모습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경성역 신축 당시 신성기념사진첩에 실린 모습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경성역 신축 당시 대식당 그릴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경성역 신축 당시 대식당 그릴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1980년대 양식당 그릴 풍경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1980년대 양식당 그릴 풍경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옛 모습으로 복원된 그릴 내부(벽난로 방향 측면).
옛 모습으로 복원된 그릴 내부(벽난로 방향 측면).
그릴의 메뉴가 나오던 장소. 안쪽 오른쪽에 지하 음식조리실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그릴의 메뉴가 나오던 장소. 안쪽 오른쪽에 지하 음식조리실에서 만들어진 음식이 올라오던 엘리베이터가 보인다.
경성역 신축 당시 출찰실(매표소) 정면 모습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경성역 신축 당시 출찰실(매표소) 정면 모습 (출처: 문화역서울284 홈페이지)
복원된 매표소 모습. 경성역 당시와 똑같다.
복원된 매표소 모습. 경성역 당시와 똑같다.
경성역 2층에 위치했던 이발실 내부.
경성역 2층에 위치했던 이발실 내부.
경성역 신축 당시 2층 이발소였던 복원전시실의 현재 모습.
경성역 신축 당시 2층 이발소였던 복원전시실의 현재 모습.
이발소 거울이 붙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발소 거울이 붙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 동경에서 출발해 독일 베를린까지의 일정이 담긴 손기정 마라토너의 탑승권.
일본 동경에서 출발해 독일 베를린까지의 일정이 담긴 손기정 마라토너의 탑승권.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공간이 귀빈실 입구다. 2층 이발소와 그릴의 출입구는 별도의 계단이 이용됐다.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공간이 귀빈실 입구다. 2층 이발소와 그릴의 출입구는 별도의 계단이 이용됐다.
그릴 옆쪽에 위치한 2층 소식당. 복도처럼 보이지만 중앙홀과 플랫폼을 내려다보며 간단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라운지로 사용되었다.
그릴 옆쪽에 위치한 2층 소식당. 복도처럼 보이지만 중앙홀과 플랫폼을 내려다보며 간단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라운지로 사용되었다.
서울역 전경.
서울역 전경.

♣ ‘100년 더The 공간’은 오래됐지만 가치 있는, 또는 소멸되고 쇠퇴해가는 것을 다시 꺼내 살려내는 공간·마음·사람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2023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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