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말씀하셨다.

‘근래 어떤 사람은 이 세상이 말세가 되어 영영 파멸 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하노니…지금은 묵은 세상의 끝이요, 새 세상의 처음이 되어, 시대의 앞길을 예측하기가 퍽 어려우나 오는 세상의 문명을 추측하는 사람이야 어찌 든든하지 아니하며 즐겁지 아니하리요.’(<대종경> 전망품 19)

어느 시대나 위기는 늘 뱀처럼 똬리를 틀고 사람들을 현혹한다. 사람은 긍정보다 부정에 더 민감하기에 ‘위기’라는 말만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기의식은 누군가의 밥그릇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수가 종종 있다. 

소태산이 살아낸 100여 년 전의 세상도 암울했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성자의 안목은 세상의 빛이고 길이 된다. 위기가 곧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종교의 위기, 혹은 원불교의 위기는 좋은 보약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소태산은 ‘공부 없이 도통을 꿈꾸는 무리와, 노력 없이 성공을 바라는 무리와, 준비 없이 때만 기다리는 무리와, 사술로 대도를 조롱하는 무리’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고, 특히 ‘모략으로 정의를 비방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가득하여, 각기 제가 무슨 큰 능력이나 있는 듯이 야단을 치고 다니나니, 이것이 이른바 낮도깨비’(<대종경> 전망품 9)라며 주의를 당부한다. 

남 탓으로 해법을 찾으려 한다면 그건 낮도깨비와 다름이 없다. 모든 갈등의 원인은 ‘남 탓’에 심지를 박고 있기 때문이다. 등잔불이 자기 아래는 비추지 못하듯, 남 탓으로 자기를 밝히려 하는 것 역시 어불성설이다.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결정을 얻지 못하게 하는 불신은 남 탓에 기인한다. 

지금 원불교가 어려운 건,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위는 아래를 아래는 위를 탓하며, 중앙은 지방을 지방은 중앙을 탓하며, 선진은 후진을 후진은 선진을 탓하기에 골몰한다고 해서 해답이 얻어지는 건 아니다. 

그래서 소태산은 ‘나의 조물주는 곧 나이며, 일체 생령이 다 각각 자기가 자기의 조물주’(<대종경> 변의품 9)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세상을 밝힐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으며, 스스로가 세상의 길을 만들어가는 주인공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물주가 남 탓만 하면 세상의 질서는 무너지고 중생들은 이정표 없는 길목에서 헤매고 방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의 책임은 무겁다.

농구를 메고 들에서 돌아오는 산업부원들을 가리켜 ‘저들이 다 우리 집 부처’라고 한 소태산의 손가락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비가 와도 새들은 난다. 어미 제비는 폭풍이 쳐도 새끼의 배를 채울 생각에 날갯짓을 쉬지 않는다. 지금 원불교는 당신이, 또 우리가, ‘책임져야 할’ 교단이다.  

[2023년 7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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