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가 노루목에서 수양하던 24세(1914년) 때였다. ‘무장(茂長) 선운사(禪雲寺)에 가면 뜻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소태산 대종사는 선운사 산내 암자를 찾아갔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 수양처로서는 번거로움이 많았고, 여비 문제 등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이 생겨 얼마간 머물다 돌아오게 된다. 

돌아와서는 당장에 먹고 살 끼니도 없는 판이었다. 하물며 타관에 나가서 살 여비 마련이란 엄두도 못낼 형편이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한 채 우두커니 있게 되자,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김성섭(팔산 김광선)은 선운사 산 너머 사는 친지의 초당을 알선해줬다. 초당은 연화봉 중턱(연화리 산 77-2)에 있는 3칸 오두막집이었다. 김성섭의 친지는 고창군 심원면 연화리에서 한약방을 하는 연강 김준상이라는 인물로 피부병 치료에 용하다고 소문이 난 의원이었다. 김준상은 집 인근의 산에다 초당을 지어 정신이 복잡하면 그곳에서 쉬곤 했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렇게 연화봉 초당에서 적공 기간을 보내게 되고, 훗날 이곳을 ‘연화 초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하기 전 이곳에서 한겨울 3개월간 마지막 정진을 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초당에 들어갈 때 쌀 한 말과 간장 한 되를 들고 가, 불도 때지 않고 생활했으며, 잠이 오면 초당 아래 우물에서 목욕재계하는 등 한마음으로 피나는 수행 정진을 계속했다. 이 같은 고행은 훗날 해수병을 얻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연화리에 사는 한 처녀가 소태산을 흠모해 초당에 몇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일부러 자리를 피했으며, 처녀가 돌아가고 난 후 그가 앉았던 자리를 물로 닦아내며 수행에만 전념했다는 일화가 있다. 결국 소태산은 이 처녀의 연정으로 인해 애당초 5개월 예정이었던 연화봉 수양을 3개월여 만에 끝내고 돌아온다. 

처음 올 때 입고 온 한 벌의 솜옷은 이불 겸 사용한 옷이라서 떨어져 흉하고 먼지가 났다. 가지고 온 쌀 한 말도 두되 정도가 남았다. 보통 사람의 식사량은 한 달에 한 말 두 되 이상 먹는데, 석 달 동안 여덟 되로 지냈으니, 1/4도 안 먹은 격이다. 

연화봉 초당에서의 수양 기간은 소태산 대종사가 입정삼매에 들게 되기까지 큰 적공이 됐다. 그렇게 3개월간의 적공으로 수양력을 뭉쳤고, 지혜를 얻는 신력(神力)을 얻어 간혹 내왕하는 김광선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대종경선외록〉 구도고행장 5절). 소태산 대종사는 연화봉 초당의 3개월을 보내면서 대각을 이루기 전까지 입정돈망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교단에서는 원기67년(1982) 초당 터를 포함한 부근 3천여 평을 매입, 그 터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초당 터에 ‘연화삼매지’기념비를 세워 교단의 성적지로 보존하고 있다.

[2023년 7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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