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해 기자
장지해 기자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햇수로 4년 만에 코로나 첫 확진을 맞았다.

초반 증상은 경미했다. ‘이 정도면 뭐’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버티지 말라는 선 경험자들의 조언도 가벼이 넘겨 들었다. 

증상은 하루하루 달랐다. 오늘 없던 증상이 다음날 생겨났다. 예측할 수 없음이 무엇보다 가장 당황스러웠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격리 해제를 하루 앞두고 결국 병원으로 향했다.

의사는 지난 4년 동안 이미 나 같은 환자를 수십, 아니 수백 명 만났을 것이다. 환자를 보기만 해도,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어떤 약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굳이 증상을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구구절절 말한들 “원래 다 그래요”라는 말로 응대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병원에 들어섰다. 그런데 의사의 반응은 의외였다. 증상이 어떤지 친절히 물어봤고, 들어줬다. ‘굳이 말할 필요 있겠어?’라는 생각이 사라진 나는 그간의 상태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증상은 이때부터 나타나서 이날 PCR 검사를 받았고… 이제는 기침이 너무 많이 나와서 목과 가슴이 너무 아프고….”

내 말을 차분히 듣던 의사가 웃으며 말한다. “아이고, 일반 감기처럼 생각하면 안 돼요. 지금 제대로 치료 안 하면 나중에 훨씬 더 많이 고생해요. 선배들은 이미 겪은 일을 뒤늦게 겪느라 고생이 많네요.” 그 순간, 무언지 모를 찌르르함이 마음을 채워냈다. “원래 다 그래요” 하고 툭, 상대의 말을 가벼이 쳐내지 않는 의사를 만난 덕분인 듯했다. 

우리는 흔히 “말해봤자 무슨 소용(있겠어)”라는 말을 한다. 거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겼을 것이다. 말할 가치가 없으니 하지 않겠다는 것일 수도 있고, 해봤자 듣지 않을 것이니 하지 않겠다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론 나의 설명이 가벼이 치부될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으로 ‘말하지 않음’을 선택하기도 한다. 특히 어떤 일에 있어 언쟁이 오갈 땐 더욱 그렇다. 아닌 이야기가 흘러나와도, 누군가 말도 안 되는 말을 주장해도, ‘여기에 말을 섞어봤자 무슨 소용’이라는 생각으로 무관심하거나 무대응 한다. 그러다 보니 때론 아닌 이야기가, 말도 안 되는 말이, 일방적인 주장이 마치 ‘진실’이자 ‘전체’인 양 부풀려지고 확대되며 기정 사실화 된다.

하지만 그 와중에 누군가 ‘아닌 것은 아니다’고 용기 내 말한다면, 이는 분위기를 바꾸는 기점이 된다. ‘진실’을 ‘진실’그대로 볼 수 있게 하고, 상처받은 마음들을 다독이고 봉합하게 한다.

아닌 말에 흔들리지 말고, 아닌 말에 아니라 하는 용기를 내자. 그래야 서로 덜 상처받고 덜 흔들리며, 덜 아프다. 말은 하고 볼 일이다. 특히 그것이 ‘정당하고, 진실하다면’ 더욱.

[2023년 7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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