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요즘 같은 폭염에 밖에서 일하다 보면 금세 땀범벅이 된다. 덥고 땀나서 싫다는 마음이 올라올 때면 ‘남들은 일부러 찜질방도 간다는데 무료 찜질한다 생각하자’고 마음을 바꿔먹으니 신기하게도 뜨거운 햇살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똑같은 현상이 마음 따라 좋게도 싫게도 받아들여지니 세상만사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다들 이런 걸 일체유심조라 표현할 것이다. 

일체유심조라 하면 항상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바로 원효대사 해골 물이다. 신라 승려 원효가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 동굴에서 자다 마신 상쾌한 물이 밝을 때 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것이다. 해골 물을 보고 구토를 느낀 원효는 맛있던 물이 더럽게 변하는 것이 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 마음이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라로 되돌아와 법을 전했다는 일화다. 이 일화가 일체유심조의 대표적 이미지이며, 일체가 다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이 올바른 해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물론 억지로 꿰맞추면 맞는 구석도 전혀 없진 않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것들은 일체유심조의 본뜻과는 아무 상관 없는 잘못된 해석이다. 일체유심조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 보라. 설마 큰스님 원효대사가 겨우 그 정도 필부필부가 다 알 법한 내용을 가지고 큰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구도의 당나라행을 접었겠는가 말이다. 일체가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이 평범한 걸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세상 어느 누가 깨달음을 못 얻겠는가. 그렇게 쉽게 이해되는 일상적인 상태를 견성, 깨달음이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일체는 오직 이 우주 가득한
하나인 마음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영된다.
그런 이유로 마음인 내가 
조물주요 신이요 하늘이다.

그렇다면 일체유심조는 대체 무슨 의미인가. 일체 우주만물을 오직 마음이 만든다는 뜻이다. 이 말이나 그 말이나 같은 말 아니냐고? 전혀 아니다. 여기서의 마음은 생멸 있는 생각 감정 분별의 마음이 아니라 성품을 일컫는 것이며, 진리 일원 하나님 신 조물주와 같은 말이다. 성품(마음)이 곧 일원이며,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니 일체를 일원, 즉 마음(성품)이 만든다는 뜻이다. 진리가, 신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고 운영하기 때문에 신을 조물주라 한다. 진리가, 마음이 일체를 낳고 기르고 거둔다. 유정물은 생로병사로, 무정물은 생주이멸로, 우주는 성주괴공으로, 천지는 춘하추동으로 끝없이 창조하고 운영한다. 일체는 오직 이 우주 가득한 하나인 마음에 의해서 존재하고 운영된다. 그런 이유로 마음인 내가 조물주요 신이요 하늘이다. 허공은, 진리는 모두의 것이니 일체가 조물주며 신이다. 먼지 하나도 허공 한 지점도 이 마음을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일체가 한 몸인 법신불, 동일체, 동일자다. 견성하지 못하면 일체유심조는 도달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엄청난 경지다. 

그 물을 마신 자나 해골 물이나 중국이나 신라가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마음이 부처이고 신이며 조물주임을 원효는 깨달은 것이다. 더럽고 깨끗함은 내가 전체인 법신불에 있지 않고 따로 분리되어 나왔을 때 일어난다. 온 우주가 오직 하나인 나밖에 없으니 더러운 해골 물이나 더러움을 느끼는 내가 따로 없다. 더러움도 깨끗함도, 그것을 느낄 자도 없는 오직 천상천하유아독존임을 깨달은 것이 일체유심조다. 

일체유심조의 해석을 일체가 다 마음먹기 달렸다고 한다면, 만약 ‘저 사람은 소나무다’라고 마음먹으면 그 사람이 진짜 소나무가 돼야 맞지 않겠는가. 얼토당토않다. 온 우주만물 일체를 오직 마음 하나가 만든다는 일체유심조를 본의에 완전 어긋나게 해석하면서도 제대로 안다고 믿고 있으니 큰스님 원효대사께서 어찌 웃음이 나지 아니하실까.

/변산원광선원

[2023년 8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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