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은 교도
김대은 교도

[원불교신문=김대은 교도]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그 신념이 옳고 그르든 간에 또는 강하고 약하고 간에 심리학에 따르면 신념은 한 인간의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한다. 극작가 버트란드 러셀 또한 “인생에 대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한 신념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낭만주의 연극의 선구자였던 아우구스트 슐레겔은 “모든 위대한 업적은 신념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념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삶의 원동력이다. 

‘신념’을 화두로 꺼내 든 이유는 교단 제4대 제1회를 앞두고 교단의 교화 위기에 대해 청정한 마음에서 다시 한번 그 문제를 돌이켜 보기 위함이다. 예를 들어,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는 “자기가 하는 일에 신념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좋다고 믿으면 힘이 생기는 법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얼마나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교화에 임하고 있는지를 이 시점에서 한번 짚고 넘어갈 필요성이 있다.

정산종사는 일찍이 교화에 대해 “사람을 교화하는 이는 자신이 먼저 실지로 느끼고 체험하여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말로 설교하며, 진실하게 참다운 인연을 널리 맺고 대중을 두루 살펴 감화시켜야…(중략)”(<정산종사법어> 공도편 50장)이라고 말씀한 바 있다. 결국 교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설교에 진심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심은 신념에서 비롯되고, 신념은 곧 종교에서 신심이 되기에 우리는 신심에 대해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한다.
 

우리는 종법사를 
소태산과 같은 한 분으로
체받들고 있는가?

신심과 신성에 대한 강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한 신심 또는 신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다소 껄끄러울 수 있지만, 교단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대승적 차원에서 그 의미를 되짚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런고로 ‘신심’을 간결하게 정리하면 ‘절대복종’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가르침을 구해 찾아온 서상인(추산 서중안)에게 “나의 가르침에 절대 복종할 것이요, 따라서 어떠한 괴로움이 있다 하여도 항거(抗拒)와 계교를 두지 말라”(<대종경선외록> 사제제우장 17절)이라고 했다. 

이러한 소태산 대종사의 생각은 사람을 쓸 때에 잘 드러난다. 소태산 대종사는 “매양 그 신성과 공심과 실행을 물으신 다음 아는 것과 재주”(<대종경> 실시품 40장)을 물었다. 즉 우리가 소태산 대종사의 법을 받들어 일원주의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면, 신심을 갖고 신성으로 뜻을 이뤄야 한다. 그런데 항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스승의 큰 뜻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와 같이 중근기에 빠진 공부인들을 경계했다. 그들에 대해 “법을 가벼이 알고 스승을 업신 여기기 쉬우며”(<대종경> 신성품 2장)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심과 신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중근기에 빠져 큰 뜻을 체 받지 못하게 된다.

오늘날 교화 위기는 결국 소태산 대종사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는 데 있고, 그 소태산 대종사의 뜻이 곧 종법사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음을 깨우치지 못했기에 비롯되는 것이라고 본다. 대산종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법신불이 바로 대종사요 대종사가 바로 법신불이니, 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종법사는 대종사와 한 분임을 알아야 믿고 받드는 데 차질이 없느니라”(<대산종사법어> 신심편 25장)이라고 말씀한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교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불편한 질문을 피하면 안 된다.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그 신심과 종법사에 대한 신심이 한결 같았는가.’ 이 질문은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 신심과 그 신성에 차별이 없을 때야 비로소 교단은 주세 교단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한강교당

[2023년 8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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