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은 교도
김대은 교도

[원불교신문=김대은 교도] 사바세계는 중생들이 살아가기에는 몹시 고단하고 힘겨운 곳이다. 태어나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발생하는 고난의 과정은 인간에게 불가피하게 주어진 예정된 숙명이며 필연적인 절차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라도 예외 없이 자신의 의지나 선택과 무관하게 비유컨대 거센 바람에 시달리고 거친 파도에 휩쓸리며 난감하게도 짓궂은 흙탕물을 뒤집어 쓰기 일쑤다. 

고통은 외부의 상황이나 현실적 여건에서도 비롯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진리를 가리고 이치를 은폐시키는 무시 이래 이어져 온 번뇌로 말미암는다. 따라서 개개인이 직면하는 시련과 역경을 포함하여 가난이나 기아 같은 외적 환경은 괴로움의 우선적인 해결 과제나 시급한 개선 대상이 아니다. 삶의 본질적인 행복이 주변 환경의 선의와 무관하듯이, 비참과 불행의 근본 원인은 타인의 악의와 관계없이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무명(無明)과 독기 때문이다.

의도적이지 않게라도 산에 흔적을 내는 것은 무욕의 산짐승들이 아니라 탐욕에 물들고 세속에 감염된 인간들이다. 그래서 인간이 지나다니는 곳에는 풀도 자라지 않고 그 자리에 길이 난다. 
 
남 탓에 익숙한 덕택(?)에 우리는 벌어지는 일마다 줄곧 남을 비난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사태를 부정한다. 안 풀리는 인생에 대해, 비협조적인 아랫사람에 대해, 무능한 부하에 대해, 무례하거나 저급한 상대에 대해, 무심한 남편과 잔소리에 능란한 아내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밖을 향한 습관적 불만과 으레적 불평을 멈추고 일방적인 자책을 견제하면서 문제의 출처를 자신의 내면으로 이관하면 빈축의 양상 또한 전혀 달라진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는 태도야말로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이중 기준을 경계하는 일.

‘문제가 나에게 있을 수 있으므로 거기서 원인을 찾아보겠다’는 그 소소한 전향적 태도에 의해 불만은 이해로, 불평은 용서로, 시비는 화해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러한 회향과 반조를 망설이고 주저한다. 어설픈 자존심에 가해지는 상처가 부담스럽고 성난 마음에 주어지는 여유와 관용이 위선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자신이 심각하게 여기는 혼란과 갈등, 비참과 부조리는 기실 스스로에게서 시작됐을 가능성이 농후함에도 불구하고 그 책임을 간과하거나 일부러 외면한다. 그래서 큰 서원과 발심을 위해서는 단호한 결심과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꾸짖음을 받는 사람을 보거든 그 사람을 흉보거나 비웃지 말고 먼저 자신의 행실에 대하여 고쳐야 할 바는 없는지 살피라고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남의 허물만 밝히므로 제 앞이 늘 어둡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는 태도야말로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이중 기준을 경계하는 일이다. 이쪽에서 겨누는 비난의 손가락질은 저쪽에서도 일어나므로 옳고 그름이 항상 내 판단과 주관대로만 결정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퇴계는 선조에게 올린 군왕의 일을 충고하는 글인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에서 학문을 통해 자기 중심이 확고해져 안목의 객관성이 확보되면 “물이 습한 곳으로 흐르고(水流濕), 불이 마른 곳으로 나아가며(火就燥), 구름이 용을 추종하고(雲從龍), 바람이 범을 따르듯(風從虎)” 간신배가 사라지고 어진 신하들이 모여들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은 정치뿐만 잣대의 편향성에 몸살을 앓는 일상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물과 불과 구름과 바람이 지향하는 곳은 예컨대 요사스런 마음의 준동이 차단된 곳으로 소태산 대종사께서 이르신 지혜있는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먼저 살피므로 남의 시비를 볼 여지가 없는, 바로 그 마음과 같은 곳이다.

/인천교당

[2023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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