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호 교무
박윤호 교무

[원불교신문=박윤호 교무] 유럽 어느 나라에 수도원이 있었다. 산속의 이 수도원은 최초로 설립된 수백 년 전부터 묵언(默言) 수행의 전통을 지켜왔다. 

어느 날 수도원장은 수도원의  분위기가 상당히 조화롭지 못함을 느꼈다. 그래서 한 사람씩 운영상의 건의사항을 적어서 제출하도록 했다. 

그런데 제출 건을 본 수도원장은 깜짝 놀랐다. 하나같이 다른 이들이 저지르는 잘못과 그에 대한 불만이 빼곡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수도를 한다는 사람들이 가장 곁에 있는 사람들을 곱게 바라보지 못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수도원 설립의 목적과 몹시 거리가 먼 일이었다.

자괴감에 빠진 수도원장은 특단의 대책을 세웠다. 수백 년간 이어온 묵언의 전통을 깨고 일주일 중 몇 시간을 정해 구성원들 간의 필요불가결한 소통을 나누도록 한 것이다. 이후 수도원 분위기는 놀랄 만큼 바뀌었다. 상호 협력의 태도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모두가 종교인으로서의 품성이 두터워진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동안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억눌리고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씨앗들을 선제적으로 다스린 결과였다.
칡(葛)과 등나무(藤), 두 덩굴 식물이 휘감겨 있으니 우리는 이것을 갈등이라 이름했나 보다. 인류의 역사가 갈등으로 점철된 것을 되돌아보면, 옛사람들도 갈등관리의 어려움을 깊이 느껴왔다고 할 수 있다.
 

갈등은 조직에 위해될 수도
성장을 자극할 수도 있어.
동체대비의 각성이 
조직 갈등 해결의 실마리.

갈등을 분석해보려는 시도는 근대에 인간에 대한 탐구를 확장시켜 나가며 시작됐다. 그러나 그 관점부터가 ‘갈등은 악(惡)이며 반드시 제거돼야 할 것’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출발한다. 따라서 갈등이 전혀 없는 상태야말로 조직에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연구가 지속 되면서 새로운 시선이 등장하게 된다. 갈등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갈등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그것이 조직에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살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다 현대 갈등이론은 조금 새롭게 전개된다. 갈등을 ‘높은 갈등상태’와 ‘낮은 갈등상태’로 구분하고, 너무 높은 경우에는 알려진 바와 같이 조직의 파괴를 가져오며, 오히려 너무 낮은 경우에도 무자극한 상황이 조직의 성장을 둔화시키는 저해요소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직이 오로지 구성원의 성과 여부에 따라 승자독식의 구조로 보상을 하면 극심한 인력의 이탈이 일어난다. 한편 열심히 일하든 대충 일하든 보상이 일률적인 경우 아무도 노력을 하지 않게 됨과 동시에, 높은 능률을 보이는 사람들은 조직을 떠나게 된다. 따라서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최적 갈등 수준을 유지해야 조직의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현대 갈등이론이다. 

갈등의 원인에는 여러 가지 분석과 분류가 있다. 그중 특히 가장 해결이 어렵고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는 것에는 상대방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그로 인한 공포에서 나오는 다툼들이 있다. “저렇게 놔뒀다가 나중에 ○○하게 바뀌면 어떻게 하느냐”가 주된 패턴이다. 중세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그랬고, 역사 속 수많은 이교도 학살이 그랬다. 가까이는 종전 후 수십 년간 “용공”으로 몰린 진보사상이 그랬고, 이제는 한국 사회를 잠식해버린 젠더, 세대, 민족, 빈부의 갈등이 그렇게 전개되고 있다.

정산종사는 사람의 투쟁이 처음에는 ‘사상전’에서 시작해 다음에는 ‘세력전’으로 옮기고 다음에는 ‘증오전’에 옮겨서 필경은 무의미한 투쟁으로써 공연히 대중에게 해독을 끼치기 쉽다고 하셨다. 감정의 요동을 다스리지 못한 갈등의 전개는 결국 ‘문제해결은 온데 간데 없게’ 되고 마침내 서로에 대한 공격만 남게 된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의 각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갈등 해결의 시작점이다.

/김화교당

[2023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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