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소태산 대종사 연화봉 초당에서 고행하다

한겨울에 정진했던 고창 연화봉초당 터 ‘연화삼매지비'
한겨울에 정진했던 고창 연화봉초당 터 ‘연화삼매지비'

소태산 대종사가 영광(靈光) 영산(靈山) 노루목에서 수양하던 스물네 살(1914) 때였다. 구도의 열의는 불타올랐으나, 어찌할 방향을 몰라 엄동설한(嚴冬雪寒)에 찬방에서 변변한 이불도 없이 홀로 앉아 ‘이 일을 어찌할꼬?’ 하는 걱정만 하고 있었다.

이때 이웃 돛드레미[범현동(帆懸洞)]에 사는 김성섭[법명 광선(光旋)]이 딱한 처지를 보고 고창군 심원면 연화봉 중턱에 있는 친지 김준상(金駿相)의 오두막 초당을 소개하여 수양하도록 하였다. 초당에서 한겨울임에도 얼음물에 목욕하고 찬 방에 밤을 새우며 수행 정진하였다. 

입정(入定) 삼매(三昧)에 들어 정진하고 있던 봄기운이 완연한 어느 날, 한 처녀가 찾아와 사랑을 고백하였으나 이를 피한 뒤 정진을 계속하였다. 얼마 후 하산(下山)하기 위해 정리하자 입산할 때 한 말 가지고 온 양식은 석 달을 지내고도 두되 남짓 남았고, 솜옷 한 벌은 이불 겸 사용하여 흉하고 먼지만 났다. 초당에서 불철주야 정진으로 상당한 수양력을 얻어, 이때부터 이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이때의 고행 난행으로 해수병(咳嗽病, 기침병)이 생겨 평생 고생하였다. 

연화봉 초당 터를 김준상의 후손이 교단에 희사하여 1984(원기 69)년 터를 원형대로 보존하고 소태산 대종사가 초당에서 정진한 내력을 적은 ‘연화삼매지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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