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하 교무
이도하 교무

[원불교신문=이도하 교무] 소설의 시점에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 삼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관찰자 시점이 있다고 중학생 때 배웠다. 

인칭이 물리적으로 결정된 나 또는 너, 그리고 남이라는 입장이라면, 시점은 다소 유동적이다. 소설에서는 이인칭 시점이 없고, 일인칭이라도 시점을 좁혀 보거나, 넓혀 볼 수 있다. 삼인칭 전지적 시점쯤 되면 작가가 신처럼 세상 구석구석, 등장 인물들의 마음속을 넘나든다. 

메타버스 환경을 거쳐 요즘 AI 환경이 대중화되면서 확장된 콘텐츠로서의 인칭이나 시점은 좀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최근에는 웹소설만 해도 일인칭과 삼인칭의 명확한 경계가 무너지는 사례가 많다. 재미에 비중을 두고 상대적으로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웹소설의 특성상 주인공·전지적 시점과 관찰자 시점을 바꾸거나 혼용하기도 한다. 

아직 메타버스-AI·IA 콘텐츠의 인칭이나 시점에 주목하는 글을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미래 콘텐츠의 특성이나 가능성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라 본다. 
 

언어의 문법에서 인칭을 다룰 때 등장하는 무인칭 또는 비인칭 같은 표현을 생각해 보자. 무인칭은 ‘인칭이 없다’, 비인칭은 ‘인칭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언어 문법에서는 ‘일반적으로는…’, ‘누구나…’ 하는 식으로 주어를 특정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시점을 적용하는 경우를 무인칭·비인칭으로 표현한다.

메타버스의 환경에서는 내가 그대로 아바타로 전이되기 때문에 일인칭 콘텐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메타버스의 특성에 따라 시야가 조금씩 다르고, 특히 다양한 부캐(부캐릭터)로 확장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다인칭적이라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와 타자를 동시에 학습한 AI라는 존재는 뭐라고 봐야 할까. 중(重)인칭? 사은의 공물이라는 표현이나 무아나 전아, 자아와 참 나의 관계도 떠오른다.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문화대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아낸 11명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11명의 주인공은 각 장에서 각각 일인칭 시점으로 상황을 서술해간다. 소설은 11명의 일인칭 주인공 시점을 모아놓은 것이기도 하고, 일인칭이었다가 삼인칭이었다가… 어찌 보면 이인칭이 되기도 하는 복합시점을 시도한다. 때문에 소설로서의 몰입이 방해될 수도 있겠지만 특히 역사라는 복합적인 현상을 다루는 신선하고 적절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메타버스 환경, 나아가 AI·IA의 시대 콘텐츠는 좀 더 복잡한 인칭과 시점들이 서로 얽힐 수 밖에 없다.

/한국예술종합학교

[2023년 8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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