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독서실을 끊어달라던 아들은 밤마다 거리를 쏘다녔다. 이를 안 어머니는 아들을 앞세우고 신도안으로 향했다. 당시 삼동원 고시촌엔 고시생도 있었고, 그 같은 말썽쟁이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그해 겨울, 신도안에는 종종 대산종사의 야단법석이 열렸다. 첫눈처럼 생경하고 소복한 원불교와의 시간. 훗날 아들은 한양대생이자 인천교당 청년이 되고, 아내와 두딸까지 일원가족을 이뤘으며, 지금은 신도시 송도의 교화 역사를 쓰고 있다. 윤지영 교도(송도교당, ㈜구앤윤 RED 부사장)의 이야기다. 

결혼한 아내(구수정 교도)는 크리스천이었는데, 온화하던 어머니(故 김진정 교도)도 여기만은 완고했다. “결혼하면 한 가정에 종교는 하나여야 한다.” 권사인 장모님 역시 “결혼하면 그 집 종교를 따라라”고 했으니, 의외로 퍽 부드러웠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어머니와 인천교당에 나갔고, 큰아이는 원불교 어린이집에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앞에 교당이 생겼다. 송도 신도시 초기에 들어온 그에게는 5년 만의 반가운 소식이었다. 변화가, 여기서 일어났다. ‘그전까지 몸만 오갔던 정도’였던 그를 바꾼 시작은 다름 아닌 아내였다.

“아내가 장오성 교무님과 마음공부 한다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 일어나보니 독경을 듣고 있는 거예요. 늘 눈뜨면 독경 테이프부터 틀던 어머니 모습이 겹쳐 보였죠.”

그 시절 그는 인생의 가장 큰 고비를 지나고 있었다. 명예퇴직 후 대표를 맡은 회사를 크게 키웠으나 사람과의 문제로 떠나야 했고, 중국에서의 새 사업마저 좌절됐다. 돈도 없지만 자존감은 더 없었던 시절, 아내는 “그동안 열심히 했잖냐. 교당에도 다니고 있으니 걱정말고, 평소 하고 싶었던 드럼이나 배워라”라고 쿨하게(?) 등을 떠밀었다.

“그때 코로나19로 교당 출석이 훅훅 줄었어요. 당시 생각하기를, 내가 몸은 있으니 출석으로 보은하자 싶었습니다.”

마침 연배 비슷한 송원근 교무가 오니, 그와 송 교무는 둘이서 법회도 보고, 날로 커가는 송도 여기저기를 다니기도 했다. “공부는 집사람이 잘하지만 어릴 때부터 내 몸에 배어있는 분위기는 못 따라온다”며 너스레를 떠는 윤 교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허공법계 CCTV’로, 내가 알고 진리가 아는 이치를 늘 되새긴다. 

이 아침, 그에게 아내는 말했다. “인터뷰라니, 어머님이 얼마나 좋아하실까.” 신심 장한 아들의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2023년 8월 23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