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길고긴 비행 끝에 도착한 아프리카, 그곳에 첫발을 디딘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평생을 교육에 바쳐온 신항균 전 서울교육대학교 총장(법명 효영, 압구정교당 교도회장). 중학교와 공군사관학교를 거쳐 서울교육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총장에 이른 그의 일생은 학생이라는 ‘잘 배우는 사람’을 길러냈고, 교사라는 ‘잘 가르치는 사람’을 길러낸 시간이었다. 지난해 퇴임 후 다시 시작하게 된 인생 2막의 눈과 귀는 이제 아프리카 어린이에게로 향한다. 그는 (사)아프리카어린이돕는모임 이사장이 된 지 보름 만에 아프리카를 찾았다.

“아무리 일정을 쪼개도 8일밖에 안 나와요. 오가는 데 하루가 넘고 라모코카와 요하네스버그, 까풍아의 거리도 만만찮더군요. 가보니, 먼저 그처럼 오지에 그 많은 시설을 갖췄다는 점에 놀랐습니다. 벽돌 하나, 배움 한 자락이 모두 우리의 정성에서 비롯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죠.”

그는 마지막 일정인 까풍아교당에서 현지인들과 법회를 봤다. 독경이며 기도를 어떻게 할지 궁금했던 그에게,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한글로 부르는 성가가 들려왔다. 얼마나 연습했는지 어색한 발음도 없이 또박또박. 세상 가장 아름다운 원불교 성가 합창, 바로 그 순간 그는 이 선하고 아름다운 아이들의 미래를 그려냈다.

어린이와 아프리카가 더 잘 되기 위해
김혜심 교무와 조정제 전 해양수산부 장관(분당교당)에 이어 법인의 키를 잡게 된 신 이사장. 그의 꿈은 지난 25년이 가진 역사와 이를 홍보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자료들을 정리해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후원자들에게 현지의 이야기를 전할 유튜브 채널도 만들 예정인 것. 

“아무리 세상이 척박해졌다 해도, 선한 마음이나 좋은 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줍니다. 그게 이 세상을 맑고 밝히는 힘이죠.” 

이번 일정 내내 그는 자문했다. ‘이제 아프리카 어린이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 답은 역시 ‘교육’이었다. 아프리카 역사에 켜켜이 녹아있는 ‘타자녀교육’ 정신을 더 잘 실천하는 것, 그것이 교육자이자 교육행정가였던 그에게 소명이라는 생각이었다. 

“어린이들이 더 잘 자라고, 라모코카와 까풍아, 나아가 아프리카가 더 잘되기 위해 교육을 업그레이드시킬 거예요. 원불교적 인성교육을 접목하려 해요. 원불교 유치원에서 운영해온 프로그램을 발굴, 파견도 가고 현지 교사들도 교육해 교법이 바탕된 인재로 키워내고자 합니다.”

듣기 좋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다. 그는 그의 모든 인프라와 역량을 총동원해 아프리카에 ‘진짜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다. 초등학생 방과후교실로 기초과목을 지원하고, 미술이나 합창 등 예체능교육도 펼치고 싶다. 

“우리 태권도클럽은 그 큰 남아공에서 최고로 꼽혀요. 예체능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숨겨진 재능을 꺼내 줘야죠. 피카소 같은 천재 화가나 메시 같은 최고의 축구선수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현지 유치원에 원불교 인성교육 녹여내고, 예체능교육 계획 
공군사관학교 교수 거쳐 서울교육대학교 15대 총장 역임

교사의 입장 대변할 수 있는 장치 있어야
아이들 얘기에 활기를 띠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가 평생 해온 일이 바로 교육이며, 교육자들을 길러내는 일 아니던가. 아이들을 사랑했고, 아이들을 가르칠 교사들을 바르게 길러내는 데 몸과 마음을 다했던 그. 그런 그에게 최근 교권 침해며 젊은 교사들의 좌절은 뼛속까지 아픈 고통이다. 

“사실 갈등은 이전에도 계속 있었어요. 부족함 없이 자란 아이도, 내 아이가 대우받게 하고 싶은 학부모도, 교사를 사명이 아닌 직업으로만 여기는 선생도, 모두가 변한 결과죠. 다만 위축된 교사가 지도를 못 하게 되면 그 피해가 다른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가는 게 안타깝습니다.”

사실 교사가 그런 상황을 마주할 때, 교권을 보호해주는 장치는 거의 없다. 더욱이 민원은 크나큰 핸디캡이기에 학교 입장에서는 이를 덮기에 급급하고, 따라서 교사 개인의 문제로 국한해 해결하고자 한다. 서글하던 신 이사장이 단단하게 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교사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장치나 제도가 있어야 합니다.”

100년 전 강의 노트 그대로 쓰는 교수
이제 그의 신앙을 되짚어본다. 남원 운봉의 외가에서 가장 먼저 입교한 사람은 외할머니 윤보처화 교도(열반)다.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한 원기28년(1943) 입교이니, 외할머니로부터 이어온 신앙은 그의 손주까지 5대에 이른다. 그에게는 어머니 박원국 교도(열반)을 따라갔던 부안교당이 첫 기억이다. 이후 전주고와 성균관대 시절에는 인연이 없었다가 영동교당에 박혜순 교무가 부임하며 다시 연이 닿았다. 당시 서울에 있던 부안교당 출신들을 불러 모았는데, 그중에는 훗날 LA교당 교도회장을 맡은 그의 큰 형(신상우 교도)도 있었다. 

“어렸을 때 좀 다니다가 건너뛰고 어른 돼서 왔으니, ‘원불교 검정고시’라고도 하죠. 그래서인지 좀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100년 전 소태산 대종사님은 가장 혁신적인 분이셨잖아요. 당시 남녀평등이라며 여자를 남자들 앞에 세워 설법하게 한 일이나 교무의 복장은 파격 그 자체였고요. 그 혁신을 이어받아야 하는데, 우리는 혁신은 오간 데 없이 그 복장만 갖고 있단 말이죠.”

그의 안타까움은 이렇게 비유된다. “30년, 50년 전의 강의 노트를 그대로 베끼는 교수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100년 전 강의 노트를 그대로 쓰고있는 게 아닐까요?”
모든 경계와 결정 앞에서 그의 질문은 늘 같았다. “소태산 대종사님이라면 어떻게 취사하셨을까.” 평생 자문해온 그 문장으로 이제는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교단을 생각하는 신 이사장. 학생부터 예비교사까지를 두루 헤아려온 그의 타자녀교육은 이제 아프리카 어린이를 따뜻하게 보듬을 것이다.

[2023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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