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어떤 이는 짧고 굵게, 어떤 이는 길고 가늘게, 어떤 이는 적당히 살다 가기를 원한다. 너무 짧아도, 또 나만 지나치게 길게 살아도 별로일 것 같다. 허나 죽음은 내 의향대로 딱 맞춰 오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올지 아무도 모른다. 미리 안다고 대비할 수도, 달라질 수도 없다. 별수를 다 써도 막지 못하고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데려간다. 

꿈자리가 어떻다느니 점쟁이가 뭘 조심하라 했다느니 그런 무당 같은 소리는 부질없고 쓸데없다. 헛소리로 업 짓느니 차라리 입 닫고 잠이나 잘 일이다. 설령 죽음에 대해 안다 한들 인연과로 오는 진리 작용 앞에 뭘 할 수 있는가.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길은 없다. 죽음의 날을 알고 사는 것처럼 고통스런 것도 없으니 모르는 게 은혜다. 진리는 자비롭게도 죽음의 시간을 아무도 모르도록 설정해 놓았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이제 곧 평균수명 백세시대가 도래한다. 죽음은 단어조차 꺼려지는 두려움이고, 오래 살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인가 보다. 중국 진시황은 세상 사는 게 뭐 그리 좋았던지 불로불사를 꿈꾸며 다양한 영약 불로초를 구해 먹었어도 49세에 떠나갔다. 불로장생을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낸 불사조 피닉스는 500년마다 한 번 스스로 향나무를 쌓아 불을 피워 타 죽고 그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이집트 신화 속에 나오는 새다. 피닉스처럼 살면 좋겠다 싶은 이도 있겠고, 80세도 길다고 여기는 이도 있겠다.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잘 살고 잘 죽는
생사해탈

죽음의 문제는 누구에게나 깊은 화두다. 잘 살고 잘 죽는 것, 생사해탈이란 무엇일까. 
생사해탈은, 나이가 웬만큼 들어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거나,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렇지 않다거나, 남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거나, 빨리 죽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사해탈의 전제조건은 불생불멸의 진리를 요달하여 나고 죽는 데에 끌리지 않는 것이다. 핵심은 견성을 못한 이는 결코 생사해탈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체가 텅 비어 오고 갈 곳 없는 불생불멸한 성품을 훤히 보아야 생사해탈이 가능하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죽지 않는다. 우주 가득한 신령한 성품인 나는 죽지 않는다. 갈래야 갈 곳도 없고, 갈 수도 없다. 온 천지에 나 하나뿐인데 어디로 갈 것인가. 
나라고 믿었던 몸과 의식은 생멸이 있지만 성품인 진짜 나는 생사가 없다. 변화하는 것, 사라지는 것은 색과 수·상·행·식, 몸과 의식이지 성품 자체는 불생불멸이다. 생로병사 하는 것은 기질이지 영이 아니다. 

영은 온 우주에 하나다. 하나의 신령한 영이 온 우주에 가득하여 다 보고 듣고 다 알아 작용대로 재구성시키며 일체만물 허공법계를 다 운영한다. 그 하나의 영이 바로 마음바탕 성품인 나며, 일체 우주만물의 것이기도 하다. 

진공으로 체를 삼아 진공 자리에 머물면 죽음이란 없다. 그 진공, 성품이 나이니 그 자리에 툭 맡겨두고 아무 걱정 없이 잘 지내는 것이 생사해탈이다. 불생불멸임을 아는 까닭에 생사에 관여하거나 끌리지 않고 온전히 내맡긴다. 생멸 없는 진여가 곧 나이니 여여한 마음으로 영원히 잘 살아간다. 항상 자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잘 살고 잘 죽는 생사해탈이다. 

사실은 말이지, 단지 해탈하고 못하고의 차이만 있을 뿐, 견성과는 무관하게 아무도 죽을 수 없다는 이 엄청난 천기누설!

/변산원광선원

[2023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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