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관 교도
여도관 교도

[원불교신문=여도관 교도] 다가오는 9월 10일은 ‘세계 자살예방의 날’이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예방협회(IASP)가 세계 각국과 자살 예방 대책을 마련하고 공동의 노력과 정보를 공유하고자 제정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끔찍한 수준이다. 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는 2011년 31.7명에서 2021년 26명으로 감소하긴 했지만 여전히 OECD 평균 11.5명의 두 배가 넘는다. 우리나라에서 자살률이 급등한 시기는 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0년 후반이다. 성장에 모든 것을 걸었던 한국사회가 고도성장 아래 감춰졌던 사회적 모순에 눈을 뜬 시기이기도 했다. 

수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자살률 폭증의 중요한 이유를 산업화·도시화로 인한 공동체 해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존력을 높여 온 종(種)이지만, 우리 민족처럼 공동체적 가치를 삶의 중심에 둔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통사회에서는 어려움에 처한 이웃이 있으면 십시일반(十匙一飯)했고, 설혹 굶어 죽는 사람이 생기면 마을 구성원 전체가 비난의 대상이 됐다. 한민족은 가족, 마을, 나라까지도 운명공동체, 생존공동체로 여겼고 상부상조를 통해 국가가 책임져야 할 교육, 복지 및 재난 구호까지 담당했다.

우리 민족의 유전자에 새겨진 공동체주의가 반세기 산업화 과정을 통해 희미해졌다고는 하나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 노인이 공경받고 자식들에 의해 당연히 봉양되던 향촌사회의 향수를 간직한 노년층은 경제적 궁핍 속에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과 자살률의 동반 상승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더불어 청소년과 젊은 층의 자살률도 압도적 세계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왜 우리의 젊은이들은 얼마 살아보지도 않고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권인 생명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일까? 구성원들이 서로를 경쟁이나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자신이 처한 문제를 공동체의 조력을 통해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질수록 자살은 증가한다. 또한, 공동체에서 낙오됐다는 무력감이 사회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도 하는데, 그래서 ‘묻지마 살인’과 같은 사회적 폭력도 자살과 같은 맥락이다. 칼끝이 나를 향하느냐 사회를 향하느냐의 차이일 뿐. 

공동체가 해체된 자리에는 수많은 고립된 개인이 자리한다. 그래서 요즘 사회적 키워드가 된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단어가 무섭다. 사자성어는 대부분 중국이나 한국의 고사를 배경으로 만들어지지만 각자도생은 연유된 이야기가 없다. 역사학자와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각자도생이 쓰인 흔적이 없으며,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시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었던 선조 27년이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되고 온 백성이 생존의 위기에 몰렸던 전란 때 생긴 ‘각자도생’이 현실의 키워드가 된 의미는 무엇일까? 어떠한 어려움에 처해도 누구의 도움도 기대하지 말라는 섬뜩한 경고가 당연한 시대에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

“자살하지 마라 / 천사도 가끔 자살하는 이의 손을 / 놓쳐버릴 때가 있다 / 별들도 가끔 너를 / 바라보지 못할 때가 있다.” 정호승 시인이 <별들은 울지 않는다>에서 말한 것처럼, 고립된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다. 가끔은 천사가 나의 손을 놓아도, 별이 나를 바라보지 않아도, 머지않아 다시 손 내밀어 줄 이웃이 있다는 확신이 생명을 살린다. 

모든 사람이 행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립되고 소외되고 외로워선 안 된다. 종교는 소외된 개인을 따뜻하게 품어줄 얼마 남지 않은 온전한 공동체다. 이제 종교가 시인의 외침에 화답해야 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우리가 바라보고 있다고.

/강남교당

[2023년 8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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