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타원 전팔진 원로교도
진타원 전팔진 원로교도

[원불교신문=이여원 기자] 진타원 전팔진 원로교도(이리교당). 그의 본적은 ‘전북 익산시 북일면 신용리 344-2’, 즉 중앙총부다. 불법연구회 초창기,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설계해 준 집을 지어 익산총부 구내에 온 가족이 살았고, 그 집에서 그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고등학교까지 총부 구내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 기억이 확연하다. 구타원(이공주 종사) 할머니집을 지나면 총부 사무실이 있었고, 그 옆 팔타원(황정신행 종사) 할머니집, 그 옆이 자신이 나고 자란, 큰 방(소태산 대종사 당대 선방) 하나를 놀이터 삼던 ‘우리 집’이다. 총부 교무들 생활관도, 세탁부도, 두 집 건너 금강원도 그는 또렷하게 그려낸다. 전 원로교도와의 인터뷰는 부친(혜산 전음광 대봉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됐다.
 

‘원불교 가주지부’ 창립, 미국 연방·주정부 종교법인 인가   
소태산 열반 사진 등 교단 역사 남긴, 부친 전음광 선진 회상

교단 최초의 사진사, 전음광 선진
소태산 대종사의 은자(恩子) 제1호인 전음광 선진은 ‘교단 기관지 발행의 필요성을 앞장서 강조했던 시대 감각과 비전을 가진 선각자’로, <월말통신> 17호(원기 14년)에 실린 기관지 발행에 대한 회설(會說)이 주목된다. “기관지는 그 사회나 단체의 호흡이다. 시대에 적응한 문물과 사조를 때때로 주입하여 잠자는 자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고, 게으른 자로 하여금 근면하게 하여 그 사회 그 단체의 생명을 유지해야 한다.”

부친에 대한 기억 하나 하나가 선명한 전 원로교도. 그의 가슴에 더 선명하게 새겨있는 것은, 바로 소태산 대종사 열반 등 교단 역사에 소중한 자료로 남겨진 ‘사진’과 관련된 부친의 모습이다.

“저의 아버지는 소태산 대종사님 당대에 여러 법문들을 직접 수기하고 사진으로 남기신 분이어서 ‘교단 최초의 사진사’라는 별명도 가지셨어요.” 전 원로교도의 기억이 이어진다. “그 당시 총부 구내에 있던 우리집(지금도 겉모습은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음) 안방 벽장에 커다란 암실을 만들어 놓으시고, 네댓 개의 높지 않은 네모난 물통에 사진들을 담궈 놓으셨던 모습이 지금도 머릿속에 뚜렷해요.”
 

당시 대산종법사께 받은 감사패.
당시 대산종법사께 받은 감사패.

역사적인 순간의 사진들
지나간 시간은 사진으로 선명해지는 걸까. 부친이 찍었던 당시의 사진을 기억하는 전 원로교도는 주저함이 없다. “소태산 대종사님 열반하셨을 때 하얀색 홑이불을 덮으시고 흰색 베개를 베고 누워계신 사진이며, 까만색 옷을 입고 상여를 메고 나가시던 당시 젊은 남자 교무님들 사진, 일제의 제압으로 장지까지 상여 뒤를 따라갈 수 없었던 일반 교도님들이 논길로 밭길로 상여를 따라 줄지어 가던 사진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전 원로교도는 모친(동타원 권동화 종사)에게 들었던 사진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사진기를 들고 빈소에서 계속 사진을 찍고 있는 부친을 구타원님이 ‘모두가 슬퍼서 경황이 없는 때 사진만 찍느냐’고 큰소리로 꾸중하시는데도, 아버지는 ‘우리 회상의 역사를 남기는 일’이라고 하시며 계속 사진을 찍으셨대요. 결국 어머니까지 구타원님께 꾸중을 듣게 되고,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버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 역사적인 사진들은 전 원로교도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 사가에 소중하게 보관돼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에게 사진을 한 묶음 싸서 주시면서 ‘이 귀중한 사진을 우리집에서 개인적으로 보관하면 안되겠다’며 총부 사무실(옛 구타원 종사 사가 뒤편)에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어요.” 그때 직접 총부 사무실에 ‘한 묶음의 사진’을 전달한 장본인이 전 원로교도다. 당시 사진을 받았던 교무의 이름 석자를 적어두지 못했던, 자신의 불찰을 전 원로교도는 크게 후회한다. “그 어려웠던 처지에서도 굽히지 않고 귀한 사진을 남겨주신 분인 아버지의 함자 대신 다른 선진이 회자되는 것을 늦게야 알게 됐어요. 여러 방면으로 사실을 확인해서 교단 초창기 사진에 대한 사실이 정확해지고, 교단 역사에 오점이 남지 않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한국의 원불교 미주 상륙’
지금으로부터 54년 전(1969)의 일이다. 전 원로교도는 결혼하자마자 외환은행의 장학금으로 유학을 가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가게 됐다. 출국 인사를 드리는 자리에서 당시 대산종법사는 “두 사람이 합력해 미국에 교당을 창립해보라”는 막중한 책임을 부여했다. 

50여 년 전의 미국 유학 생활, 당시 경제가 어려웠던 한국정부는 유학생들이 가져갈 수 있는 소지금을 200달러로 제한하고 있었다. 가난한 젊은 유학생들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대산종법사의 말씀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터, 원산 이제성 교무와의 인연이 불씨가 됐다. 당시 흑인촌 태권도 도장의 빈공간을 빌려 법당을 만들고, 중국 타운, 일본 타운 등에서 불구 등을 준비해 ‘원불교 가주지부’(가주=캘리포니아)의 현판을 걸었다. 미국 최초의 원불교 교당 봉불식을 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미주판 1면에 실린 기사.
〈동아일보〉 미주판 1면에 실린 기사.

당시 유일한 한인 신문인 <동아일보> 미주판에는 ‘한국의 원불교 미주 상륙’이라는 큼지막한 제목의 기사와 함께 ‘원불교 가주지부’라는 현판 사진이 신문 1면에 실렸고, 당시 얼마 되지 않은 한인 사회에 큰 뉴스거리가 됐다.

이후 합법적인 종교활동을 하기 위해 미국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종교법인 인가를 받기까지, 남편(임향근 전 원광대 경영학 교수, 임산 임명근)의 고생과 노력도 잊지 못할 고마움이다. 비용부담을 덜기 위해 변호사의 도움 없이 동분서주하며 어렵게 얻은 ‘원불교 미주 종교법인 인가서’는 현재 원불교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원불교 가주지부’는 ‘원불교 로스앤젤레스교당(당시 라성교당)’으로 성장 발전해, 지금은 LA 한인타운 근교 3층 단독 건물인 ‘원불교 미주서부교구 교구청’의 면모를 갖추고 많은 연원 교당을 두고 있다. 

원기54년(1969) 7월 대산종사가 미국에 유학 중이던 전 원로교도의 언니(아타원 전팔근 종사)에게 보냈던 친서의 일부다. “(중략) 팔진이가 더욱 큰 서원을 세우고 잘할 것을 약속하고 뜻을 세우니 또한 큰 희망이고 자랑스럽다.”
 

세번째로 구입한 원불교 라성(LA)교당.
세번째로 구입한 원불교 라성(LA)교당.

[2023년 8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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