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영 교도
박하영 교도

[원불교신문=박하영 교도] 나는 2013년 3월에 주재원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중국 북경에 가게 됐다. 그리고 북경에서 8년, 북경 옆 천진에서 2년을 생활하고 올해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북경으로 들어가기 전, 남편 누나인 형님의 권유로 원불교를 만났다.

왕징이라는 한인타운에 자리 잡은 베이징교당은 ‘젊음’ 그 자체였다. 당시 40대 초반의 내가 나이 든 편에 속할 정도였다. 원불교를 본격적으로 접하기 시작하면서 어머님께 받은 <원불교교전>은 있었지만 뭘 어떻게 공부하고 연마해야 하며 생활 속에서는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할지 매우 막막했다. 교당만 열심히 다니던 나를 당시 교구장이던 김성희 교무님이 기도의 길로 안내해주셨다. 기도 CD를 주며 매일 시간을 정해 집에서 기도를 해보라고 한 것이다. 어차피 시간은 많고 외국에 살면서 걱정거리는 한가득이니 기도를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수요일에는 마음공부 하고, 일요일에는 법회 보고, 집에선 매일 기도를 하다 보니 원불교가 어떤 공부를 하는 곳인지 느낌이 오기 시작했다.

걱정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때마다 나는 원래 없던 그 요란하고, 어리석고 그른 마음들을 청정한 그 자리로 비춰 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김신원 원무님 부부가 북경에 오면서 ‘마음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고, 김길선 교구장님과 함께 이천일 기도로 연장해 하고 있는 기도 덕분에 우리 부부는 북경에서 버틸 수 있었다. 
 

요란하든, 요란하지 않든,
공부를 적게 했건, 많이 했건,
고민이 적든, 많든
그냥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

기도는 매일 저녁 7시 반에 시작됐다. 기도 주관은 교도들이 직접 돌아가면서 했다. 그때는 절실함이 귀찮음을 이겼다. 그 힘으로 한국에 온 지금도 ‘견행견심 베이징교당 2천일 정진기도’를 집에서 이어갈 수 있다.

2019년 겨울에 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고 2020년을 공포 속에서 보내며 교당에 거의 가지 못했다. 그러다 2021년 우리 부부는 천진이라는 도시로 가게 됐다. 북경에서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늘 우리를 보호해주던 교당이 바로 옆에 있었다. 힘들 때마다 배고플 때마다 달려가던 교당이 없는 허전함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교당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낀 우리는 가끔 빗장이 풀릴 때마다 북경교당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코로나19 상황 속 공포와 지루함은 ‘유튜브’ 속 여러 법회와 많은 교무님의 보석 같은 설법으로 이겨냈다.

한국에 와서 생활한 지 약 1년, 원불교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갔나 싶을 정도로 여러 가지 각양각색 경계들로 흔들리고 있다. 경산상사님께서 중국순방차 오시어 베이징 훈증법회 때 던지셨던 화두를 항상 가슴에 새겨 두고 있다. ‘끽다거.’ 요란하든, 요란하지 않든, 공부를 적게 했건, 많이 했건, 고민이 적든, 많든 그냥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

북경에서 교당을 다녔던 지난 10여 년은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고향 같은 베이징이, 그리고 천진이 너무 그립다. 어려운 가운데 교당을 수호하고 고군분투하는 김길선 교구장님과 중국 각지의 11개 교당 12명의 교무님들께 감사를 전한다.

/베이징교당

[2023년 8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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