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민소연 기자] 도자기 꽃을 잘 그리는 아가씨와 연구실에서 실험하던 총각이 눈이 맞았다. 도자기 인형을 유럽에 수출하던 1980년대, 천안의 한 요업공장의 경사였다. 결혼 후 독립, 남편이 반제품을 받아오면 아내가 집에 딸린 작업실에서 작픔을 완성해냈다. 두 살 터울로 태어난 남매는 곰 인형보다 흙을 먼저 만났고, 오뚜기 대신 도자기 인형을 갖고 놀았다.

숨 쉬듯 흙을 만지고 밥 먹듯 도자기를 빚어온 가족의 삶. 사업 규모가 커지기도 했고 부침도 있었지만, 그 사이 엄마는 자기 작품을 내놓는 도예가가 됐다. 따로 가르친 적도, 그 길로 가라 한 것도 아니지만 남매도 그 뒤를 따른다. 김영숙(법명 도원)· 방선영(법명 성인)·방지웅(법명 성현) 도예가 가족(김포교당)의 얘기다.

엄마의 법명을 딴 공방 ‘도원요’
가족 전부가 도자기와 살아왔으며, 넷 중 셋은 도예가인 이 가족. 아버지 방오성 교도 역시 수십 년 도예 인생을 지났으니, 그야말로 ‘흙으로 맺어진 가족’이다. 이 가족에게 최근 또 한번의 경사가 있었다. 제53회 경기도 공예품대전에서 엄마(도원도예연구소)가 대상을, 아들(상상공간)은 장려상을 수상한 것이다.

“오래전부터 작품을 내왔는데 올해 좋은 결과가 왔어요. 경기도공예품대전을 계기로 매년 각자가 새로운 작품을 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거든요. 내 실력도 돌아보고, 트렌드도 읽고, 과감히 도전도 할 겸 매년 출품해왔죠.”

김영숙 작가에게는 부단한 적공의 기록이자 자신을 채찍질하는 기회였던 대회. 내후년이면 도자인생 반세기를 맞는 장인은 말에도 겸양이 배어있다.

“아들과는 함께 일하고, 딸의 공방(도자숲)과도 20분 이내 거리에 있어요. 자주 모여서 작업도 하고 대화도 나눕니다. 도예가 협업이 쉽지 않은데, 가족인 데다 각자의 장점이 다 다르다 보니 함께 한 작품을 내기도 하죠. 젊은 감각에 많이 배우기도 하고요.”
 

제53회 경기도공예품대전 엄마 대상, 아들 장려상 수상.
흙으로 맺어진 가족, 사업성과 기획·연출력 더한 남매.
신앙 3대, 사업 부도 때도 일원가정 힘으로 함께 극복.

펜 든 손과 샅바 잡던 손 결국 물레로
자신의 큰 눈을 쏙 빼닮은 남매를 보며 엄마는 옛 추억을 더듬는다. 어렸을 때부터 흙과 도자기를 벗 삼아 놀던 남매는 학교에 다녀오면 작업실에서 부모님을 도왔다.

사업 규모가 제법 커지며 직원들도 많아졌는데, 직원들은 남매에게 묻고 배우기 일쑤였다. 그 와중에 딸은 공부를 잘했고, 아들은 씨름선수로 이름을 날리며 다른 꿈도 꿨더랬다. 허나 차례로, 펜 든 손과 샅바 잡던 손은 결국 다시 물레를 돌렸다.

“엄마아빠가 이 길을 권하진 않으셨어요. 잘될 때도 있었지만, 저희 중고등학교 즈음에는 부도가 났었거든요. 도자기는 돈이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고, 손 많이 가고 힘들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죠.”

흙을 만지는 것부터 작품을 빚어 가마에 들여 불의 허락을 기다리고, 오래 기다려 꺼내서야 비로소 제 몫을 할는지 알게 되는 도예. 그 많은 과정 중 뭐 하나를 뺄 수도, 기계에게 맡길 수도, 하다못해 제자에게도 쉬이 맡길 수 없는 것이 바로 도공의 일이다. 그런데도 앞날 창창한 남매는 엄마의 고된 길을 좇아갔으니, 그만큼 가족을 믿어서였고, 또 그토록 흙이 좋아서였다. 

부도가 났으나, 꼭 도예과에 가고 싶었던 남매는 선생님이 몰래 내준 급식비로 밥을 먹었고, 대학 입학전형료 몇만원도 친구에게 빌려 원서를 썼다. 곧 가족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지하 방에서 다시 시작했고, 남매는 낮에는 아르바이트, 밤에는 집안일을 돕다 책을 펴고 잠들었다. 그런데도 늘 두각을 나타내며 어디서나 주목을 받았던 방선영·방지웅 작가. 집이 공방이었고, 부모가 스승이었으며, 손이나 옷자락에 늘 흙이 묻어있던 인생의 내공은 도무지 감춰지지 않았다. 

“누나는 도자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예의 매력을 전하는 데 뛰어나요.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빗살무늬토기키트나 미니물레 같은 사업성도 따라갈 수 없죠.”

낯도 안 붉히고 조곤조곤 누나 자랑을 펼치는 동생. 이번엔 누나가 화답한다.

“저 샅바 잡던 큰 손으로 뭐든 참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게 동생의 강점이에요. 도자기 벽화나 공공예술 같은 기획·연출과 지역 문화에서의 활약도 뛰어나고요.”

남매의 활약은 도예를 젊고 친근하게 만드는 한편, 젊은 예술가의 자립과 역량을 지켜내는 힘이 되고 있다. 이처럼 전통을 잘 받아 시대 속에 녹여내는 이 가족의 힘은 바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신앙이다. 
 

일원상처럼 관대하고 오롯한 흙 같은 삶
“힘들 때도 다 같이 이겨내고, 한 길을 걷는 건 우리가 일원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원불교는 우리에게 믿고, 쉬고, 위로받는 곳이었고, ‘원불교가 내 생명줄이다’ 하며 살았어요.”

원불교와의 인연은 돈암교당 청년회 출신인 아빠 방오성 교도로부터였다. 천안교당에서 올린 결혼식은 권도갑 교무가 주례를 섰고, 부천으로 이사하고는 부평교당의 창립을 도왔다. 처음엔 “남편이 신혼집에 염불 테이프 틀어놓는 것도 싫었다”던 김영숙 작가는 부평교당 1호 입교자가 됐고, 서서히 이 법에 젖어 들었다. 특히 이제는 손자녀들까지 이어지는 일원가족으로서의 신앙은 보람과 은혜 그 자체다. 

“일원상처럼, 흙도 그렇게 관대하고 오롯합니다. 끊임없이 품어주면서도 헛되지 않은 진리가 있어요. 어느 한순간도 거짓일 수 없이 내 마음이 다 드러나는 도예라는 일, 그래서 제 꿈은 바로 흙 같은 삶입니다.”

엄마와 딸과 아들이 빚어온 도공의 시간이 도합 99년, 한낱 길가의 흙이라도 소중히 담아 결국 쓸모와 아름다움을 만들어왔다. 이 가족의 손들은 또 무엇을 귀하게 빚어낼 것인가, 이제 100년 세월이 이들 앞에 있다.

[2023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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