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법이 하나에 돌아갔다 하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깨침의 여부를 가늠하는 최고의 화두 중 하나다. 선사들의 화두는 해석을 잘하느냐 못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그 자리를 훤히 깨달아 표현하고 있다면 영생사가 해결되고 있는 경사요, 찰떡같이 해석을 잘 해도 나와 만법과의 관계를 모른다면 빛 좋은 개살구다. 만법귀일과 나의 관계를 아는 것이 관건이다. 

만유의 움직임을 만법이라 한다. 만유를 하나가 운영하므로 만법귀일이며, 그 하나가 일원이다. 일체 우주만물은 각각의 운영자가 따로 있지 않다. 온 우주 허공법계와 무량무수의 유정물 무정물의 운영자는 오직 하나다. 

독자적인 나의 운영자가 따로 있어서 내 의지대로 사는 게 아니다. 내 마음이 나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라면 지금부터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보라. 아무리 안 하려고 해도 의지와 상관없이 무슨 생각이든 떠오르고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내 몸이니 내 의지로 조정이 가능하다면 몸이 어떤 작용도 하지 않도록 한번 해보라. 불가능하다. 하다 못 해 재채기를 하든 하품을 하든, 순환을 시키든, 눈을 깜박이든, 숨을 쉬든, 한순간도 몸이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이 저절로 움직인다. 일체의 심신 작용을 내 의지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다 끊어져 잠들어 있을 때도 진리가 다 알아서 자동적으로 작용 되게 한다. 죽는다고 그 작용이 멈추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일으킨다고 하는 모든 의지조차도 진리에 의해 일어난다.
 

일체는 그 자리를 떠날 수도,
떠난 적도 없다.
떠난 적이 없으니
돌아가고 말 것이 없다.

하나의 위대한 법신불이 모든 심신작용을 쉼 없이 경영한다. 하나의 법신불이 만법귀일처이며, 이것이 일체 만물을 멈춤 없이 작동되게 한다. 그 작용으로 드러난 모습을 크게 분류하면 성주괴공 생주이멸 생로병사 춘하추동이며, 관여되지 않는 것이란 먼지 하나도 없다.

일체 우주 만물의 작용인 만법은 오직 하나가 한다. 그 하나는 텅 빈 허공이며, 신령한 것, 공적하면서 영지함이다.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언어적 표현일 뿐, 정확히는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일체는 그 자리를 떠날 수도, 떠난 적도 없다. 떠난 적이 없으니 돌아가고 말 것이 없다. 동작이나 노력이나 시간이 필요한 돌아감이 아니라, 알고 모르고의 문제다. 사실, 깨달음 여부와 상관없이 우주만물은 언제나 이 허공 하나가 운영한다. 만법귀일처인 일원, 성품, 허공 하나가 만법의 주관자다.

하나로 텅 빈 허공이 호리도 착오 없이 무량수의 묘유, 현실이라는 장엄한 불국토를 전개 중이다. 만법귀일처인 진공에 영지가 가득하여 다 보고 다 알아 작용대로 다시 만법으로 드러내는 것이 소위 ‘인과’다.

만유는 한 체성이며, 만법은 한 근원이다. 만유는 하나인 텅 빈 자리, 공적영지, 본원, 성품, 일원에 근원해 운영되고 있다. 따로 있는 개별적 내가 육근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만법귀일처가 운영한다. 

만법귀일한 그 자리에 머물면 오고 갈 것도, 주고받을 것도, 고락도, 자타도 없어서 곧 극락이다. 만법귀일처와 나와의 관계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괴로움으로부터의 해탈, 열반, 자유의 세계에 이르는 길은 오직 깨달음을 얻어 활용하는 일이다. 이 자리를 모르면 상대적인 분별을 지어내 자승자박의 고해에서 평생을, 아니 영생을 윤회하게 된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일체 우주 만유는 이미 다 같은 극락, 자유로운 진리의 포태에 영원히 동거 중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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