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원 소장
이준원 소장

[원불교신문=이준원 소장] 정조대왕은 “옛날 임금들은 <세종실록>에 있는 글귀들을 늘 외우고 다녔다. 우리나라의 예악, 문물은 모두 세종의 제도가 아닌 것이 없다(<정조실록>, 3년 8월 5일)”이라고 했다. 

세종은 즉위 초기 허조의 건의를 받아들여 정승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의정부 서사제(署事制)를 도입했다. 황희 정승이 주변 인물에 문제가 있어도 “그가 제안한 사항을 채택하여 실패를 본 일이 없다” 하며 계속 요직에 기용했다. “천하에 버릴 사람 없다”며 신분을 떠나서 능력을 두루 활용했다. ‘임현사능(任賢使能)’의 인재경영이다. 

의문이 풀리지 않는 경우에는 끝장토론을 했다. “서로 논박하면서 각자 마음속에 품은 바를 남김없이 진술하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은 독단적으로 추진했다. “처음은 순조롭지 못하여도 정성을 다해 매진하면 반드시 뜻을 성취한다”는 자세를 일관했다. 신·분·의·성 ‘성심적솔(誠心迪率)’의 성과경영이다. 

세종은 또 “책을 통해 다스리기는 쉽지만 실무에 당면하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도 했다.

어느 날 행차 시에 벼가 잘 피지 않는 곳을 본 세종이 농부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그리고 현장 방문 후 신하들에게 말했다. “상황이 좋다고 했는데 눈으로 확인하니 아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대책을 강구했다. 산 경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현장경영이다. 

세종은 1430년(세종 12년) 새로운 공법(貢法)의 실시를 앞두고 ‘국민투표’를 시행했다.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5개월간 당시로는 전수조사에 해당되는 약 17만 명에게 찬반 여부를 물었다. 과반 이상의 찬성으로 시안이 통과됐지만, 15년간 토론과 보완 작업을 통해 법령을 공포했다. ‘통제명정(統制明正)’의 제도경영이다.

세종대왕은 안질, 당뇨, 관절염 등 ‘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이라고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즉위 초기 처가가 풍비박산 나고 며느리 복도 없는 등 가정적으로 불행했다. 개인적 고난 속에서도 최고의 치적을 이뤘으니, ‘위공망사 민본애민(爲公忘私 民本愛民)’의 출가위 심법을 몸소 행한 성군(聖君)이었던 것이다. 

위로 갈수록 직언하는 이는 줄고 아부하는 자가 늘어간다. 세종대왕은 “임금이 되어서 아랫사람을 교묘하게 속여서는 안 된다”라며 스스로를 살피고 살았다.

/솔로몬연구소

[2023년 9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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