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장지해 기자] “한 달만 가서 살아보고 와라.”
출가를 반대하던, 아니 어쩌면 ‘시집가지 않는 삶’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한 달’을 조건 삼아 딸의 이리(현 익산)행을 승낙했다. 스물셋, 적지 않은 나이였다.

공부 재미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아버지가 찾아와 한 달이 흐른 걸 알았다. 아버지는 “집에 가자”고 했다. 딸이 물었다. “아버지께서 제 생사고락을 대신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답했다. “그건 안 되지.” 딸은 말했다. “그러면 제 인생은 제가 개척을 해야지요.” 

그렇게, 한 달은 평생이 됐다. 이를 긍타원 김광인 원로교무(肯陀圓 金光仁, 81)는 “평생이 아니라 영생이 됐다”고 고쳐 표현해줬다.

갈 때는 내 마음대로
김 원로교무는 다른 것보다 먼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오래전부터 했다는 ‘장례 문화 개선’에 대한 것이었다. ‘부의금은 받지 않겠다. 문상은 오지 않아도 되고, 있는 자리에서 심고 올려주면 충분하다. 발인식도 기념관에서 거창하게 할 필요 없다.’

이에 대해 그는 “세상에 올 때 내 마음대로 온 건 아니지만, 갈 때는 내 마음대로 가려고 준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래 일주일에 3~4건씩 초상을 치르는 후진들을 보며 더 굳힌 마음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생각들은 교역 생활을 하는 가운데 인과와 윤회의 실제를 여러 차례 확인한 데에서 기인한다. 가장 큰 계기는 마흔 살, 두 번째 근무지인 김천교당에서 4년째를 맞던 해에 있었다. 김 원로교무는 당시 신병을 앓는 어떤 사람을 보자마자 ‘종교가 할 일은 무지, 질병, 가난한 이를 구제하는 일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사람을 데려다 같이 먹고 자면서 49일 천도재를 아침저녁으로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그녀의 몸에 들어와 있는 영가들이 자기소개를 했다. 다 듣고 보니 시할아버지, 친정아버지, 여동생, 아들 등 여섯이나 됐다. 표정과 눈빛, 목소리와 태도가 달라지는 것으로 김 원로교무는 지금 어떤 영가가 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영가들의 사연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녀의 친정아버지는 “3남매가 꽃상여로 보내줬지만, 나는 죽어서 작은딸 집의 송아지로 태어났다”고 했다. 김 원로교무가 왜 소로 태어났느냐고 묻자 영가는 “한평생 먹고 입은 것이 다 빚이 돼 그 빚을 갚으라고 소가 됐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미끄러져 다시 죽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여동생은 “딸만 계속 낳았던 탓에, 다섯째 딸을 아무도 모르게 땅에 묻은 죄로 몸을 못 받았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영가들이 49일간 수시로 그녀의 몸을 빌려 전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김 원로교무는 ‘인과’, ‘육도 윤회’ 등을 선명히 확인했다. ‘결국 자기가 지은 대로 받는 것이며, 초상을 거창하게 치르고 화환을 많이 세워놨다고 해서 좋은 데로 가는 게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직접 가꾸는 수도원 앞 화단에서.
직접 가꾸는 수도원 앞 화단에서.

한 달 조건으로 들어선 길 ‘영생’ 돼
“불성의 발로가 양심, 안 할 일은 안 해야 한다”
부의금, 문상, 발인식… 우리의 장례 문화 만들어야

우리의 ‘장례 문화’ 풍토 만들어야
김 원로교무는 오랫동안 해온 ‘장례 문화 개선’에 대한 생각을 하나씩 풀었다. 먼저, 부의금이다. 그는 “과거의 부조는 쌀 한 줌, 계란 한 줄로 초상 난 집에 도움을 주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마치 뇌물처럼 됐다. 누구는 안 챙기면서 누구는 더 챙기며 차별도 한다. 부의금을 못 낸 사람은 죄인 같은 분위기도 생긴다. 그런 문화를 우리가 안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출가가 챙기는 부의금은 오히려 상주에게 부담이 되더라”고도 했다. “교당들도 애경사비를 봉공회비 등으로 마련해 교도 개인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덧붙었다. 

문상에 대한 평소 생각도 이어 펼쳐졌다. 어머니가 열반하셨을 때, 새벽 한 시에 문상을 온 교무가 있었다. 고마웠지만, 미안했다. ‘이렇게까지 다녀가게 하는 건 아니다.’ 그때부터 생각한 것이 ‘진리는 통하니까, 무리해서 문상을 꼭 올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심고를 모셔주면 충분하다’였다. ‘장례 문화’에 대해 서로 차별 없이, 자유롭고 부담 없이 함께할 수 있는 분위기와 풍토를 만들어가자는 당부이자 바람이다.
 

양심은 불성의 발로
김 원로교무는 퇴임 후 ‘남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를 늘 마음에 담고 산다. 그래서 그의 매일 매일은 보은의 시간으로 바쁘게 채워진다. 식사 후 식탁을 닦는 일도 자처했고, 중앙수도원 앞 화단도 가꾼다. 올여름은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돌아서기 무섭게 풀이 자랐고, 손이 자주 갔다. 그래도 건강해 역할을 할 수 있으니 보람이다. 누군가 ‘좋은 일에 써달라’고 매월 보내주는 금액으로는 손수 옷을 지어 주변에 선물도 한다.

육도가 확실함을 알게 된 그로서, 빚지는 생활과 양심 속이는 일 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김 원로교무는 “명예나 권리보다도,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업’”이라며 “‘천 사람이 찬사를 보내도 선업이 아닌 것은 안 하고, 천 사람이 비난해도 선업이면 한다’를 표준으로 삼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후진들에게 해주고픈 말로도 “양심에 비추어 안 할 일은 안 해야 된다”고 전했다. “불성(佛性)의 발로가 양심”이라는 말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열아홉 살 때 그의 마음에 콕 박힌 법문 하나.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 일 가운데 큰일 둘이 있으니 그 하나는 정법의 스승을 만나서 성불하는 일이요, 그 둘은 대도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라 이 두 가지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일이 되나니라.’(<대종경> 인도품 6장)

‘나는 왜 태어났고 왜 살아가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고민하던 소녀에게 ‘성불제중’은 곧바로 서원이 됐다. 그 곧은 서원 하나는 지금까지를 살게 한 힘이자, 영생의 갈 길이다.

[2023년 9월 13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