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오성 교무
장오성 교무

[원불교신문=장오성 교무] 흔히 삶을 백척간두로 비유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심경으로 살아간다는 표현들을 쓰곤 한다. 백척간두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길,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를 비유해 가져다 쓴다. 더 이상 오를 곳도, 나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을 백척간두라고 묘사하곤 한다. 사실 백척간두에 서 있다느니, 백척간두 진일보의 심경으로 무엇을 한다는 말은 맞지 않다. 백척간두 진일보란 이런 부정적인 상황을 묘사하는 말도, 삶의 태도를 표현하는 말도 아니다. 

백척간두란 아주 높고 긴 장대를 이름한다. 1척이 약 30센티 정도니 백 척은 대략 30미터 높이다. 백이란 단순한 수의 개념보다는 아주 큰 것을 지칭한다. 30미터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만 해도 아찔한데, 그런 백척간두 끝에서 한 걸음 나아가라는 말은 대체 어쩌라는 것인가. 죽으라는 말인가. 

원래 이 말은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 현전신(百尺竿頭 進一步 十方世界 現全身)의 줄임말이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할 때 시방세계에 편만한 온전한 몸이 드러난다’는 깨달음의 순간을 표현한 것이다. 시방세계란 온 우주이며, 온전한 몸이란 법신불 진리 참나 자성이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하면 온 우주 한 몸인 법신불 진리 신 참나 성품이 드러난다, 즉 깨달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온갖 수행을 거쳐 오르고 올라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최고봉에 이른 상태가 백척간두다. 온갖 정성으로 고행·난행·수행을 해서 남들이 다 우러러보는 가장 높은 곳, 백척간두에 이르렀어도 결국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다 허사다. 진일보해야 비로소 깨달음이다. 백척간두에 올랐느냐보다 진일보를 했느냐가 핵심이다. 
 

내가 따로 없음을 믿고
전체가 나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그것이 진일보요 깨달음이다.

공부인들에게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나’를 결~코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지 이것 하나가 깨달음을 막는 견고한 장애물이다. ‘내가’ 무엇을 깨달으려고 하기 때문에 깨달음은 일어날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가 따로 없는데, ‘육근’이라고 하는 그 나 하나를 놓지 않은 채로 또 다른 ‘진짜 나’를 보고자 무진 애를 쓰는 어리석은 노력을 백척간두라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영화에서 물에 빠진 동자승이 살려고 발버둥 치다 한순간 ‘심신’을 툭 부려 내맡기니 비로소 몸이 물 위로 가벼이 떠올라 자유를 얻는다. 내가 따로 없음을 딱 믿고 전체가 나임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그것이 진일보요 깨달음이다. 많은 수행을 했는가 아닌가는 상관없이 오직 진일보를 했는가 아닌가, 깨달음에 도달했느냐의 여부만이 영생사의 해결을 좌우한다. 

머리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무아의 경지, 나로 삼았던 오온의 내가 사라지고 일체가 나 아님이 없는 상태, 나를 툭 놓아버린 순간 시방세계 전체가 온통 나 하나로 가득함을 보는 것이 바로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 현전신’이다. 나로 믿었던 일체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천지와 하나된 상태, 전체가 나임을 완벽히 깨달은 것이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한 상태다. 

도를 구하는 이들이 한결같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바로 백척간두까지 열심히 수행해 올라가고도 한 걸음을 내딛지 못함이다. 따로 있다고 믿는 그 나를 놓는 순간 깨달음이 온다. 백척간두 진일보 시방세계 현전신은 깨달음이 일어나는 환희의 순간을 표현한 법문이다.

/변산원광선원

[2023년 9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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