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영바위.
귀영바위.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귀영바위는 영산성지 길룡리 덕호동과 노루목 중간에 있는 바위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구룡(龜龍)의 형상을 하고 있어 구룡바위라 하나, 발음상 편리에 따라 귀영바위라 부른다. 

소태산 대종사는 귀영바위 근처에 집을 마련해 주막을 차렸다. 구도 생활과 함께 가사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인데, 지금은 그 터만 남아 ‘귀영바위 집터’라 부른다. 현재 영산성지고등학교 정문 앞 조그만 텃밭 부근으로 추정되며, 귀영바위 굴에서 약 150m 떨어진 위치로 추측한다.

소태산 대종사가 20세 되던 해였다. 부친 박성삼(법명 회경,晦傾, 그믐에 돌아가셨다는 뜻)이 5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로 인해 소태산 대종사는 가사부담과 구도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책임을 안게 되면서 구도 생활에 큰 변화를 맞는다. 

당시 세간 생활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소태산 대종사는 생활 곤란과 정신적 고통이 컸다. 게다가 부친과 친교가 있던 영광지방의 한 부호로부터 채무 독촉이 있었다. 그동안 부친의 후원으로 오직 도사를 만나 의문을 풀고자 했던 소태산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부친의 친구인 김성서가 귀영바위 근처에 집을 마련해 주었고, 주막을 차려 돈을 벌어 차차 빚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그곳이 귀영바위 집이다. 이때 소태산 대종사는 김성서의 질녀 바랭이네(법명 원화)를 만나게 되는데, 이후 바랭이네는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루기까지 뒷바라지 한다.

귀영바위 집에 주막을 차려 장사를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에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또 구도 열정에 틈만 나면 귀영바위 굴에 가서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이 시기 산신령이나 도사를 만나 해결하려던 문제를 자신에게서 찾으려 하는 전환을 겪었다.

주막 장사는 잘되지 않았고, 영광 읍내, 구수미, 법성, 무장 등지를 다니며 장사도 해봤으나 역시 신통치 않고, 채산이 맞지 않아 곧 그만두게 된다. 이 무렵 외숙 유성국(법명 건)의 친분 깊은 이웃인 이인명(법명 순순)이 조카처럼 지내던 소태산 대종사에게 탈이 파시(波市)에 장사 일을 주선해 빚을 청산하게 된다. 

빚을 청산하고 난 후 소태산 대종사는 ‘어떻게 뜻(의심해결)을 이룰꼬’하는 근심에 더 몰두한다. 이 시기에 소태산 대종사는 주문 두 구절을 떠올렸다. 하나는 ‘우주신적기적기(宇宙神適氣適氣)라는 주문이었는데, 이후 시방신접기접기(十方神接氣接氣)’로 고쳐 불렀다. 또 한 절은 ‘일타동공일타래(一陀同功一陀來) … 십타동공십타래’다. 이 주문은 발심 후 주야 없이 떠올라 기도 올릴 때마다 외웠고, 이때부터 깊은 정(定)에 들기 시작했다. 

[2023년 9월 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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