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투명한 물이다. 하지만 그 투명함에 햇빛과 바람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하얀 빛을 내며 하나둘 떠오르는 결정(結晶)들. 몇 시간만 더 견디면 겨울이 아님에도 눈이 내린 듯, 흰 언덕이 여기저기 소복할 터다.

그래서 하늘 천(天), 천일염이다. 하늘과 ‘함께’ 해야 결정을 보는 일이다 보니 볕이 뜨겁고 바람이 불어야 반갑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 어쩌면 염전은 ‘진공묘유(眞空妙有, 텅 비었으나 묘하게 존재함)’의 소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소 아닐까.

80년 역사 잇는 삼광염전
무려 삼대(代)다. 어쩌면 이는, 삼광(三光)이라는 이름이 지어진 때부터 정해진 수순일지 모른다. 80여 년의 역사. 김창덕 삼광염전 대표(법명 장허)는 그 역사를 묵묵히 지켜내고 있다. ‘묵묵하다’는 표현에는 이유가 있다. “‘염전을 팔라’는 끊임없는 회유와 설득에도 느긋한 성질(!) 덕분에 지킬 수 있었다”는 웃음 섞인 그의 말 때문이다. 느긋한 성질 겹겹에는 아마 이곳의 오랜 역사와 이곳에 대한 애정이 들었을 것이다.

임자도는 6개의 떨어진 섬이 붙어 만들어져 ‘육섬’이라고도 불린다. 임자도의 최초 간척 기록은 1885년(고종 22년)에 등장하는데, 이후 150여 년간 산지 침식, 흘러내린 토사 퇴적, 그리고 인간의 간척이 더해져 현재의 모습이 됐다. 

평안남도 중화군 해압면 요포리가 고향인 할아버지는 1945년 9월에 목포로 내려온 후, 주변의 소개로 임자도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간척을 시작했다. 간척은 6.25 한국전쟁 때 잠깐 중단됐다가 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35만여 평에 달하는 염전이 탄생했고, 삼광염전은 1957년부터 본격적으로 소금 생산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35만평을 모두 소유하지 않았다. 일부를 임자면에 기증해 마을 사람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기계가 없던 시절, 아마도 리어커를 끌거나 지게를 지고, 때로는 맨손으로 이곳을 함께 만들었을 이들에 대한 마음이었으리라. 실제로 어떤 마을 사람은 “(할아버지) 덕분에 굶어 죽을 사람이 많이 먹고 살았다”는 인사를 김 대표에게 건네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를 만들어 낸 그의 할아버지, 바로 원불교 육영장학재단의 효시인 은산육영재단의 설립자이자 교단 초기 수계농원을 통한 농원경제 기반 확립에 역할 한 故 은산 김현관 대호법이다.
 

김창덕 삼광염전 대표의 집은 할아버지 때 지어진 집의 골조 그대로다. 3대 부자의 모습.
김창덕 삼광염전 대표의 집은 할아버지 때 지어진 집의 골조 그대로다. 3대 부자의 모습.

소금 팔아 수계농원 지원
할아버지는 ‘염전왕’이라 불렸다. 당시 삼광염전은 할아버지의 탁월한 식견과 풍부한 덕량으로 국내 유일의 시설과 염부들을 위해 충분한 복지를 갖춘 염전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정신은 아버지와 김 대표에게까지 한 결로 이어지고 있다. 

삼광염전에서만 28년째라는 이연수 씨가 말한다. “염전 일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1년마다 이동을 해요. 그런데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동을 안 했어요. (대표님이) 염전에 필요한 게 뭔지 늘 물어봐 주고 시설 개선에도 도움을 많이 주시거든요. 서로에 대한 ‘신뢰’, 우리가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에요.”

아무리 그렇대도 할아버지의 마음 씀을 따라갈 수 있을까. 할아버지는 베풀기를 좋아해 이웃에는 늘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 표현하며 섭섭함을 토로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며 할아버지가 걸어온 길과 행적을 알고 보니, ‘가족들은 힘들었겠다’ 싶어 이해가 됐다.

할아버지는 1950년대 당시, 임자도에 중등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교육이 세상을 성장시키는 기본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외지인에 대한 경계로 인해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학교를 못 만들었다. 하지만 이때 마련해놓은 교육 사업 밑천은 원불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할아버지는 원기42년(1957) 입교하고 당시 정산종법사를 만나 큰 감흥을 얻었다. 그리고 공(公)을 향한 마음을 더 키우게 된다. 어느 날 정산종사에게 ‘교단의 가장 시급한 일’을 물은 할아버지는 ‘인재 육성’과 ‘수계농원 상황’을 전해 듣고 ‘인삼 재배’를 방안으로 제시한다. 수계농원 인삼 재배의 시작이자, 은산육영재단 설립의 배경이다. 인삼 투자로 생기는 이익금을 나누기로 한 것까지 기꺼이 포기한 할아버지는 인삼 재배에 필요한 기술자 소개, 인삼 비용 등을 모두 부담했다. 소금을 팔아 수계농원을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소금값이 늘 좋기만 했을 리 없다. 혹 소금값이 낮아져 돈이 없으면 할아버지는 집안의 땅과 재산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지원했다. 오직 ‘정산종사님과의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뿐이었으리라. 덕분에 아버지는 평생 빚을 해결하느라 고생했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우리 아버지가 좋은 일을 하다 생긴 일이니, 내가 해결하는 건 당연하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그리고 다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임자면 최초 염전(삼광염전 관리사) 선우회관에서 당시 염전종사 관계자 기념사진.
임자면 최초 염전(삼광염전 관리사) 선우회관에서 당시 염전종사 관계자 기념사진.

염전에 담긴 마음
20여 년 전, 김 대표와 그의 부인 이소봉 여사는 미국 보스턴에서의 30년 이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임자도에 정착했다. 부부가 입도(入島)를 결정하자 어머니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각종 걱정이 쏟아졌다. 그냥 지방도 아니고 ‘섬 생활’을 어떻게 하려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 여사는 “우리는 이민 갈 때도, 한국으로 돌아올 때도 ‘편안함’을 놓았다. 그래야 삶에 발전이 있으니까”라고 명쾌히 설명했다. 게다가 ‘염전’은,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을 버틸 수 있도록 한 힘 아니던가. 부부는 염전을 팔지 않아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 생각했고, 그 덕분에 어디서든 당당할 수 있었다.

부부는 매일 한 시간, 석양이 지는 시간에 나란히 걷는다. 임자도에서 살기로 결정했을 때 이 여사가 김 대표에게 제시한 ‘유일한 조건’이란다. 이 여사가 말했다. “둑길을 걸으면 이곳에 염전을 만든 할아버지를 떠올리게 되고, 그 마음을 느끼게 돼요”라고. 한 마디가 더 붙는다. “요즘 염전이 다시 뜨고 있는데, 아무래도 할아버지가 돌봐주시는 것 같아요.”

한국을 떠나있을 때도, 최근 태양광 발전 시설이 우후죽순 들어서는 상황에서도 김 대표는 염전을 꼿꼿이 지켜내고 있다. 2018년 885개이던 염전은 2021년 837개로, 매해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이 와중에 ‘지켜내는’ 보람은 남다를 터. “그거는 아주, 내 자신이 봐도 참 잘한 일이에요.” 넓은 결정지 위 바닷물에 햇볕이 내리쬐고, 윤슬이 반짝인다. 마치 새하얀 소금 결정이 뜨기 시작하는 듯 눈부시다.
 

염전을 바라보는 김창덕 대표(오른쪽).
염전을 바라보는 김창덕 대표(오른쪽).
소금 창고에 쌓인 ‘새햐얀’ 꽃소금.
소금 창고에 쌓인 ‘새햐얀’ 꽃소금.
염전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소금 결정.
염전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소금 결정.

[2023년 9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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