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신행 종사… 가난한 자들에게 만여 평의 땅 희사
고증 통해 찾은 대산종사 산책로, ‘대산로’를 내다.

한국보육원 전경.
한국보육원 전경.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70여 년의 역사가 담겨있는 한국보육원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명실상부 대한민국 아동복지의 시초가 되는 곳이다. 6.25 한국전쟁 당시 팔타원 황정신행 종사(본명 온순)가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설립했다. 

이진선 한국보육원장(교무)는 “우리나라 시설에는 ‘한국’이라는 고유명사를 함부로 쓸 수 없다. 그만큼 근대 역사에서 한국보육원의 역할을 모두가 인정하고, 국가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면서 “팔타원님의 한국보육원 역사가 후대에도 계속 전해지며, 무자력자 보호를 실천한 교단의 역사가 잊히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쟁고아의 어머니
6.25 한국전쟁 발발로 거리에는 전쟁고아들이 넘쳐났다. 유엔군의 지원으로 1,000여 명의 전쟁고아가 서울 종로국민학교에 임시 수용됐는데, 아이들은 1951년 1.4 후퇴로 위험해 처하게 된다.

이때 딘 헤스(Dean Elmer Hess) 미 공군 소령이 미 공군 수송기를 준비해(유모차공수작전) 아이들을 제주도로 이송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을 돌봐줄 시설의 필요를 요청한다. 
당시 팔타원 종사는 전쟁으로 장남 강필국을 잃은 슬픔이 컸다. 혹 사망했다면 시신이라도 찾으려 양주 일대를 샅샅이 찾았고, 여러 날을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인민군에게 끌려갔다고 말하는 목격자도 나타났지만,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팔타원 종사에게 “자기 아들만 아들인가. 그 심정도 알만하지만,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제주도에 데려다 놨으니 돌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 인연으로 제주도로 내려간 팔타원 종사는 1951년 2월 재단법인 한국보육원을 설립하고 원장으로 취임했다.
 

(좌로부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황정신행 종사.
(좌로부터) 이승만 대통령, 프란체스카 여사, 황정신행 종사.

아이들을 돌보는 환경은 좋지 않았다. 제주 농업고등학교의 교실을 어렵게 빌렸지만 마실 물조차 귀했고, 아픈 아이들도 많았다. 눈병에 안 걸린 아이가 단 한 명도 없었고,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도 치료약은 변변치 않았다. 병원에서 차출된 간호사 몇 명과 팔타원 종사가 직접 아이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듬해까지 37명의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때마다 팔타원 종사는 어린 시신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고, 아이들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무엇보다 팔타원 종사는 1천 명의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다. 그러나 정부의 보조도 거의 없는데다 기독교아동복리회의 제한된 원조만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식비도 약값도 사비로 충당해야 했다. 팔타원 종사는 때로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버린 음식을 얻어와 죽을 쒀 먹이기도 했고,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아이들은 인근 밭의 고구마와 보리 이삭을 훔쳐먹기도 했다. 그때마다 인근 주민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매번 ‘죄송합니다’ 하며 고개 숙이는 일이 빈번했다. 아이들에게 팔타원 종사는 따듯한 품을 가진 어머니 그 자체였다.

이후 한국보육원은 제주도를 떠나 서울 이문동과 휘경동(1956.11~1970.2)을 거쳐 지금의 경기도 양주(1970.3)에 터를 잡아 오늘에 이른다.
 

황정신행 종사와 아이들의 공양시간.
황정신행 종사와 아이들의 공양시간.
송추골에 세워진 ‘황온순여사기념비’.
송추골에 세워진 ‘황온순여사기념비’.

송추골에 세워진 ‘황온순여사기념비’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울대리에는 팔타원 종사를 기리는 공덕비가 하나 있다. 1968년 4월 송추골 주민들이 직접 세운 비다.

팔타원 종사는 가난한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이뤄갈 수 있도록 울대리 중앙부의 노른자 땅 만여 평을 나눠줬다. 덕분에 이들은 경제적 자립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송추골 주민들은 이 같은 은혜에 감사하며 ‘황온순여사기념비’가 새겨진 공덕비를 세우고, 후면 비문에 팔타원 종사의 인품과 주민들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새겨 보존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이 마을에서 정복을 입고 지날 때면 나이가 지긋한 주민 어르신들이 ‘황온순 여사님을 뵙는 것 같아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며, 팔타원님을 그리워한다”고 전했다.
 

한국보육원 앞 황정신행 종사 흉상.
한국보육원 앞 황정신행 종사 흉상.

대산종사 산책로 찾아 정비
양주의 한국보육원 자리는 본래 팔타원 종사의 별장이었다. 대산종사는 서른한 살 되던 해 보화당 주무로 근무하던 김서룡이 결핵으로 와병 생활하자 그를 간호하다가 결핵에 전염됐다. 원기29년(1944) 서울교당에 머물며 치료하다가, 팔타원 종사의 권유로 양주 과수원 별장에 머물러 요양하게 됐고, 이때 대산종사는 치병 생활을 하면서 뒷산으로 자주 산책을 다녔다.

이 원장은 최근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 대산종사의 산책로 정비를 마쳤다. 그는 “팔타원님을 오랜시간 가까이에서 뵀던 박유상 교도(유린교당)의 고증으로 길을 찾게 됐다. 대산종사의 산책로를 따라 잡목을 정리하며 길을 냈다”면서 “최근에는 양주시에 ‘성적지순례길’로 등록할 방안을 찾고 있다. 임시로 ‘대산로’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현재 한국보육원 아이들의 어머니는 이 원장이다. 아이들에게 라면도 끓여주고, 마당이나 근처 계곡을 찾아 놀이도 함께하며 가족처럼 지낸다. 그러니 이 원장과 산책로를 내는 일은 아이들에게 하나의 놀이처럼 즐거웠다.

이 원장은 “선진들의 역사가 점점 잊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후대에도 ‘대산로’가 기억되고, 팔타원님의 역사가 계속 전해질 수 있기를 염원한다”고 강조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오일육민족상 이사에 임명.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오일육민족상 이사에 임명.
감사패.
감사패.
2004년 경기도지사에게 받은 공로패.
2004년 경기도지사에게 받은 공로패.

[2023년 9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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